긴 기다림 끝에 '완벽한 순간' 포착한 사진거장 2인
낭만주의 회화 같은 작품
페이스 갤러리서 펼쳐
영화 감독 알렉스 프레거
완벽하게 연출한 장면 찍어
리만머핀 갤러리서 전시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집채만 한 파도에 올라타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서퍼를 리처드 미즈락(75)은 인위적 개입 없이 다큐멘터리처럼 촬영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군상을 알렉스 프레거(45)는 소품 하나까지 완벽하게 연출한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방식은 완전히 다르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점은 닮았다.
한남동의 대표적인 해외 화랑 두 곳이 나란히 사진 거장의 전시를 연다. 페이스갤러리는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리처드 미즈락의 개인전을 6월 15일까지 연다. 리만머핀도 알렉스 프레거의 개인전 '웨스턴 메카닉스'를 6월 22일까지 개최한다.
미즈락은 1970년대부터 자연과 인간이 만든 공간을 광활한 규모로 포착하는 작업으로 이름을 떨쳐온 거장이다. 현재의 사회, 정치, 환경문제에 주목하는 동시에, 사진의 역사를 연구해왔다. 미국 서부 사막에서의 화재, 핵실험, 동물시체 매립지 등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에 소장됐다. 이번 전시에는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작업 15점을 소개한다.
대표적인 사진 연작 'Icarus Suite' 'Shorebreak' 등이 포함됐다. 작가는 바다 위의 인물, 대자연의 장엄함 등 '완벽한 순간'을 끈질긴 인내심으로 포착해냈다.
신작에선 변화가 엿보인다. 작가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제작한 신작 'Elephant Parable'은 이번 서울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 이 작품은 시각장애인과 코끼리 우화에서 영감을 받아 하와이의 대나무숲에서 촬영한 1점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특별하지 않은 숲의 모습은 색상이 반전되거나, 일부를 확대하는 방식 등으로 다채롭게 변주된다. 인간 개개인이 세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관점과 이해를 돌아본 작품이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풍경의 정의를 발견하고 있는 작가는 지난 10일 국내 관객과 만나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같은 이전 세대는 인류의 흔적이 없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찍었다. 저의 세대는 인류의 시각에서 풍경을 봤다. 저의 대형 사진은 단지 순간의 기록이 아니라 피카소의 '게르니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처럼 깊은 사유를 하게 하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페이스갤러리 1층 오설록에 특별히 걸린 그의 대표작 'On the Beach'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인물을 찍은 9점의 연작이다. 하와이의 한 호텔에서 20년간 동일한 시점을 담아냈다. 그는 "9·11 테러 당시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 바다 위에 떠 있는 평온한 사람을 보았을 때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프레거는 에미상 수상에 빛나는 영화감독이자 스타 사진작가다.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꿈처럼 느껴지는 낭만적인 순간을 연출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단편 영화 '절망'이 소개되며 유명해졌다.
문화적·역사적 상징으로 가득한 그의 신작들은 한눈에도 고전 회화를 연상시킨다. 장편 영화 '드림퀼' 제작을 하며 병행 기획된 이 전시는 기술의 발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사진을 통해 표현해냈다. '웨스턴 메카닉스' 연작은 특별히 인물과 풍경이 모두 연극적·영화적으로 완벽하게 연출된 이미지다. 여러 인체가 얽혀서 역동적인 구도를 만들고 있으며, 기절하거나 고함을 지르고 키스를 나누는 인물들이 혼란스러우면서도 치밀하게 프레임을 채운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사진 작업들은 언캐니(Uncanny·낯설고 두려운 감정)한 감흥을 선사한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되돌아보는 작업인 '할리우드'는 영화 세트처럼 꾸며진 장소에서 나란히 촬영한 3점의 작품이며, '캘리포니아'는 마치 영화 '바비' 속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카우보이 모자, 성조기, 비키니 여성 등 미국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풍성하게 등장한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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