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루나發 불신···산업 육성 없이 '거래소 실적'에만 매달려

김정우 기자 2024. 5. 2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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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찾아라]
<하> '규제의 덫' 걸린 가상자산 활성화
디파이 생태계 붕괴···부정적 인식에 규제장벽 높아져
사업자 37곳 중 거래소 27곳···신규진입 2년간 1곳뿐
가상자산 채택률 27위 등 베트남·태국에 훨씬 뒤처져
투자자 보호에만 초점을 맞춘 결과 국내 블록체인 산업은 암호화폐 시세와 거래량에 좌지우지되는 취약점을 안게 됐다. 사진은 암호화폐 시세를 확인하는 한 투자자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경제]

2023년 말까지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에 등록된 계정 수는 1816만 개에 이른다. 전 국민의 3분의 1이 거래소 계정을 가진 셈이다. 이달 16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국내 가상자산 일평균 거래 규모는 약 3조 6000억 원이었다. 상반기 대비 24% 늘었다. 올해 1분기 전 세계 가상자산 시장에서의 원화 거래량(4560억 달러)은 달러화 거래량(4450억 달러)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질적인 가상자산 활용도는 한참 뒤진다. 가상자산 분석 업체 체이널리시스가 매년 9월 발표하는 ‘가상자산 채택률’ 순위에서 한국은 지난해 전 세계 27위에 그쳤다. 가상자산 채택률은 국가별 가상자산 서비스 거래량과 트래픽을 점수화한 것으로 실생활에 가상자산 서비스가 얼마나 활용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주요 지표다. 한국은 한중일 3국 중 최하위일 뿐만 아니라 정부 주도로 가상자산 친화적인 제도·인프라를 구축 중인 인도(1위), 베트남(3위), 태국(10위) 등보다 약 20계단 아래다.

가상자산 채택률은 중앙화거래소(CEX) 거래량과 개인간거래(P2P) 플랫폼 거래량, 탈중앙화금융(DeFi·디파이) 거래량 등을 총합해 산출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CEX 외에 블록체인 기반 탈중앙화 서비스에서 이뤄지는 거래량이 다른 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량의 70%가 CEX에서 이뤄지는 반면 탈중앙화거래소(DEX) 등을 통한 디파이 서비스의 거래량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아시아 크립토 허브’의 지위를 두고 경쟁하는 홍콩과 일본의 경우 디파이 거래량이 각각 68%, 52%다.

국내 가상자산 산업의 쏠림 현상이 심해진 주요 원인으로는 한때 전 세계 시총 10위권에 달했던 국내 프로젝트인 테라·루나 사태가 지목된다. 발행사인 테라폼랩스가 운영하던 디파이 서비스에서 촉발된 위기로 테라 생태계가 붕괴한 후 국내에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높아졌다. 정부 역시 디파이 등의 블록체인 서비스보다 거래소 같은 중앙화 플랫폼에 초점을 맞춰 업권법 제정을 추진했다. 국내 첫 가상자산 단독 법안인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7월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거래소가 아닌 가상자산사업자(VASP)의 경우 그 유형조차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지나치게 높은 VASP 자격 취득 장벽도 신규 사업자의 진입을 막고 있다. 정부는 2021년 시행한 특정금융정보법을 통해 VASP 자격을 취득한 사업자의 국내 영업만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필수 자격 요건으로 2종의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을 요구하는 등 신규 사업자가 부담하기에는 과도한 비용·시간이 든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VASP 신고 수리를 결정하는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심사를 통과하는 것도 쉽지 않다. 최근 2년간 FIU가 VASP 자격을 내준 사업자는 단 1곳이다. 디파이 플랫폼이 VASP 범위에 해당하는지 규정해야 관련 산업이 성장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논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내 가상자산 시장의 성패는 일부 거래소의 사업 실적에 달린 셈이 됐다. 국내 VASP로 등록된 37개사 중 27개가 가상자산 거래소다. 게다가 거래소 거래량의 100%는 개인투자자로부터 나온다. 우리나라 정부는 2018년 금융기관 행정지도를 통해 가상자산 투자 목적의 법인 실명계좌 발급을 간접적으로 금지했다. 법적 근거도 없는 전형적인 ‘그림자 규제’다.

올 3월 출범한 디지털자산 인프라 협의회의 초대 협회장을 겸하고 있는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는 “시장이 철저히 개인 중심으로 변하면서 투기가 과열되고 국내외 자산 격차가 심해지는 일명 ‘김치 프리미엄’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통 금융업에서도 은행과 증권, 카드, 보험 등 다양한 사업 유형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상자산 사업에도 이에 준하는 사업 유형을 점차 정의해나갈 필요가 있다”며 “빠른 시일 내에 합의가 어렵다면 ‘동일 기능-동일 위험-동일 규제’의 관점에서 자산운용법 등 기존 규제 범위에 가상자산사업자를 포함하는 싱가포르 등의 사례를 참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여전히 가상자산에 지극히 보수적인 기조다. 지난해 11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한 블록체인 진흥 주간 행사는 참여 기업 자격 요건에 아예 ‘가상자산을 다루는 기업은 참여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금융 당국, 전통 금융사, 가상자산 기업들이 힘을 합쳐 산업 경쟁력을 키워가는 다른 국가들과는 대조적이다. 최근 블록체인 시장에 진출한 태국 주요 금융지주사 SCBX의 루암폰 시라타나판타 블록체인 팀 리더는 “규제 기관도 업계의 목소리를 반긴다. 투자자 보호와 기술 혁신의 균형을 맞추는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함께 논의하면서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한 가지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가상자산의 리스크에만 초점을 맞춰 전 세계적인 시장 선점 경쟁에서 뒤지는 국내의 현실을 비유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서울경제신문 디센터는 29~31일 ‘비트코인 서울 2024’ 개최에 앞서 적극적으로 가상자산 허브의 기회를 노리는 동남아시아 주요국 정부·기업들을 찾았습니다.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한 가상자산의 잠재력과 미래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비트코인 서울 2024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김정우 기자 woo@decent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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