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뱅크시’ 한국에 왔다…자본주의가 사랑한 ‘자본주의 풍자’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도 다 있다. 어디서나 불편함을 주지만, 어디서나 환영을 받는다.
얼굴 없는 풍자 미술가 뱅크시는 모순적 속성을 발산(혹은 남발)하는 인물이다. 지난 20여년간 세계 곳곳의 도시를 누비고 다니면서 건물과 골목 담벼락에 지구촌의 모순을 풍자하는 낙서 작품을 남겼다. 영국 브리스틀 출신으로 뒷골목에서 그라피티(낙서)의 예술을 익힌 그는 분쟁과 갈등, 자본주의 시장의 해악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낙서를 휘갈긴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경계선 장벽에 꽃을 던지는 시위대의 상을 그렸고,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리는 로스앤젤레스 더 베벌리 힐튼 호텔 옆 골목에는 양극화의 위기를 경고하는 소외된 군상들을 그려 넣었다. 그의 분신이자 작업의 대명사가 된 남루한 쥐는 한국에서 과거 보수 정권의 한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풍자 아이콘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작업이나 작품에 항상 모순을 이고 다니는 작가지만, 더욱 흥미로운 모순은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풍자하고 공격하는 대상인 자본주의 미술시장이 뱅크시를 최고의 상품 생산자로 애지중지한다는 점이다. 2018년 ‘풍선을 든 소녀’란 액자 작품이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출품돼 16억원에 낙찰되는 순간 그는 액자 안에 몰래 설치한 파쇄기로 화폭 절반을 예쁘장하게 갈기갈기 잘라냈고, 그렇게 기괴한 몰골을 하게 된 그 작품은 2021년 소더비경매에서 3백억원 넘는 천문학적인 가격에 낙찰되면서 그를 슈퍼스타로 급부상시켰다. 지금도 소더비 쪽은 당시 사건 현장을 찍은 동영상 파일을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만들어 온라인에 퍼뜨리면서 작가 마케팅에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난해 파라다이스 예술재단의 초대로 한국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서울의 문화거리인 인사동 그라운드 서울(옛 아라아트센터)에서 지난 10일부터 시작한 ‘리얼 뱅크시(REAL BANKSY: Banksy is NOWHERE)’는 바로 이런 뱅크시의 25년간 작업 행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명작 모음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진짜 뱅크시’란 번역 제목대로 이 전시는 확실한 공인 전시를 표방한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수년 동안 뱅크시 작품들을 들여왔다며 여러 차례 전시가 열린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명확한 인증절차를 거치지 않아 논란이 일곤 했다. 이 전시는 그와 달리 국내외 뱅크시 관련 전문 큐레이터들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기획됐고 뱅크시가 관여해 설립한 ‘페스트 컨트롤’이 인증한 작품들로 구성된 정품 전시란 점에서 차별성을 띤다는 게 그라운드 서울 쪽의 설명이다.
여전히 구체적인 삶과 신원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그의 공개적인 작업 이력을 정리하고 전쟁과 공공적 폭력에 대한 저항과 비판,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풍자 등으로 채워진 여러 유명 작품이 서너가지 섹션으로 나누어져 층마다 내걸렸다. 공인된 작품 규모로 보면 역대 최대의 뱅크시 전시라고 할 수 있는 셈인데, ‘풍선을 든 소녀’, ‘꽃 던지는 소년’, ‘몽키 퀸’ 등 주요 작품 29점이 우선 눈길을 사로잡는 감상 거리다.
거리 예술로부터 파생된 초기 작품, 예술의 자본화에 대한 비판 등의 메시지를 담은 낯선 작품들, 아프리카 난민들의 탈출 구조 장면 등을 구조선에 새겨진 소녀 이미지 등과 함께 병치시킨 동영상 아카이브 등 모두 130여점을 4개층을 오르내리면서 볼 수 있다. 1970~1980년대 저항문화의 상징인 영국 펑크 문화의 세례를 받은 작가답게 폭탄을 안은 앳된 소녀(‘폭탄소녀’)나 경찰 방탄조끼를 입고 천진난만하게 뛰는 아이들(‘잭앤질’), 모히칸(모호크) 가발을 쓴 펑크 로커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정치인 처칠(‘터프 워’) 등의 작품은 어울릴 수 없는 속성의 이미지를 병치시키는 풍자의 묘미가 도드라진다. 작가는 이런 작품 미학적 얼개를 통해 지금 이 시대 세계적 갈등과 전쟁, 자본주의 물신화의 천박하고 잔혹한 본질을 담담하게 까발려낸다.
부산비엔날레 감독과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감독을 지낸 윤재갑 그라운드서울 관장은 독립큐레이터 기획전과 인근 전시공간 연계 프로젝트 등의 도전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퇴락하고 있는 인사동 옛 미술거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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