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책 너머 인공기·북한군 봤다” 서울 지키려 격돌했던 고지 지키는 그들 [박수찬의 軍]
순간 눈을 의심했다. 쌍안경으로 바라본 남방한계선 일반전초(GOP) 철책 너머에서 펄럭이는 깃발. TV에서 봤던 북한의 인공기였다.
인공기가 걸려 있는 게양대 옆엔 북한군이 쓰는 병영시설이 있었다. 낮은 지붕에 허름해보이는 이 시설을 북한군이 드나드는 모습, 인근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모습도 보였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소에서 목격한 북한군의 모습에서 남북 군사적 대치 국면이 새삼 강하게 느껴졌다.
6·25전쟁 당시 이곳을 사수한 선배 전우들의 뒤를 이어 5사단 장병들은 24시간 경계작전에 임하고 있다.
카메라와 센서로 구성된 과학화경계시스템에 더해 인공지능(AI) 기반 복합경계작전체계로의 전환도 준비하고 있다. 사람의 노력과 기술이 결합해 북한 도발을 더욱 강하게 저지하는 억제력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군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아 5사단 GOP에 있는 열쇠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선 비무장지대(DMZ)의 모습이 보였다.
안개로 전방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6·25 전쟁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유해발굴로 유명한 화살머리고지와 더불어 티본 고지, 예리고지 등이 희미하게 보였다. 70여년 전 수많은 장병이 한반도의 자유를 지키고자 자신을 희생했던 장소다.
티본 고지(290m)는 하늘에서 보면 티본스테이크와 닮았다고 해서 6·25 전쟁 때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미2사단 정찰소대장 넬리 중위가 소대원들을 이끌고 정찰 중 중공군 1개 중대와 맞서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했다.
넬리 중위는 전사한 부하 8명을 애도하고자 인근 인목면사무소 정문 기둥에 글을 새겼고, 1977년 DMZ 수색정찰 중에 이 기둥을 발견해 2003년 열쇠전망대 준공 후 전망대로 옮겼다.
전망대 북쪽의 에리 고지(183m)는 뒤집힌 알파벳 L자 모양의 고지다. 전쟁 당시 미군이 ‘기분 나쁜’이라는 뜻을 가진 에리(Eerie)라는 이름을 붙였다.
1952년 5월의 고지 쟁탈전에서 필리핀대대 수색중대 제2소대장 피델 라모스 중위는 ‘중공군이 고지 정상에 만든 벙커 8개를 폭파하라’는 명력을 받고, 돌격대를 편성해 벙커 7개를 파괴했다. 필리핀군의 피해를 없었고, 중공군은 70명의 사상자를 냈다. 라모스 중위는 이후 1992년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쟁 당시 다수의 격전이 벌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이 요충지라는 의미다. 현재 이 일대 GOP에서 경계작전을 펼치는 장병들이 임무에 집중하는 이유다.
이곳을 담당하는 GOP 대대는 경계작전 전담대대다. 여러 대대가 교대로 GOP에 전개했던 과거와는 달라진 부분이다. 예하 중대가 철책 전 구간을 나눠서 맡는다. 경계·예비소초는 일정 간격으로 순환하면서 임무를 수행한다.
GOP 너머에 있는 DMZ 내 감시초소(GP) 중 병력이 상주하는 GP는 여단 수색중대가 맡는다. DMZ 수색 등은 사단 수색대대가 담당하면서 북한군의 움직임을 감시한다.
산악 지형이 많은 중·동부전선에선 안개나 폭우, 폭설, 강풍 등의 악천후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날도 안개가 낀 날씨였다.
GOP 대대장 손영주 중령은 “1년 중 4분의 1 정도는 악천후인 것 같다”며 “악천후에서의 경계는 취약점이 많아 감시장비를 조정하고 병력을 추가하는 조치를 취한다”고 설명했다.
우리측 GOP와 GP에선 북한군 GP 등의 시설이 보인다. 전체 시설의 90% 이상이 지하에 있어 망원경으로 식별하는 부분은 전체의 10% 미만이다. 군은 레이더 등 각종 감시장비로 북한군의 지하 시설 내 움직임도 파악하고 있다고 군 관계자는 설명했다.
전망대에서 DMZ 일대를 살펴본 취재진은 방탄복과 방탄헬멧을 착용한 채 철책 순찰로 따라 이동했다. 철책 앞으로 가보니 푸르고 넓은 산지가 펼쳐졌다.
하지만 10㎏ 정도의 방탄복과 방탄헬멧 무게가 몸을 짓누른 상태에서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총과 실탄까지 지닌 채 미끄럽고 좁은 길을 오르내리는 장병들의 고생이 느껴졌다.
GOP는 주·야간 24시간 경계체제다. 이를 위해선 누군가 잘 때 다른 누군가는 일어나야 한다. 잠드는 시간도 바뀐다. 수면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계병의 체력 부담이 커진다.
모니터를 오랜 시간 봐야 하는 영상감시병도 고충이 적지 않다. 모니터에 의한 눈의 피로는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쓰거나 눈을 마사지하는 등의 방법을 쓰지만, 안구 통증 또는 두통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는 곳이 GOP다. 최전방이고 북한 도발 위험도 크기 때문이다. 상황이 발생하면 최단시간 내 움직이면서 상급부대와의 소통을 거쳐 대응해야 한다.
GOP 대대장 손영주 중령은 “최전방 경계작전은 적과의 싸움이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며 “모든 장병이 스스로를 이겨내면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24시간 365일 헌신적으로 경계작전에 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순찰로를 거쳐 대대 지휘통제실에 도착했다. 지휘통제실은 GOP 대대 경계작전의 컨트롤타워로서 작전지역 내 모든 감시장비를 모니터하면서 작전요소를 통제한다.
GOP 경계는 장병 외에도 과학화경계시스템이 사용되고 있다. 남방한계선 GOP 철책에 광망 센서를 설치하고 중거리와 근거리 카메라, TOD 열상장비, 레이더로 감시한다.
광망에 작은 움직임이라도 감지되면 경보가 울리며, 카메라는 경보가 울린 곳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휘통제실로 전달한다. 근무자는 경계소초의 초동조치반을 투입해 현장 확인 및 대응을 할 수 있다.
대대 지휘통제실은 다수의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감시장비들이 송출하는 정보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상황이 발생하면 대공혐의점 여부를 파악하고 상급부대와 소통하며 대응한다.
지휘통제실은 최고 수준의 상황관리가 가능하도록 3교대 근무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간부들도 3교대로 근무하며 퇴근 후에도 대기한다.
과학화경계시스템은 GOP 경계작전의 효율을 높였지만, 최근 5년간 월북 및 월남 사고가 발생하면서 논란을 빚었다. 장비 노후화와 고장 등이 문제가 된 것이다.
군 당국은 AI 유·무인 복합경계체계를 구축해 이같은 문제를 개선하려 하고 있다.
이곳 GOP 대대에서는 수풀투과레이더, 이동식레일로봇 카메라, AI TOD를 시범도입해 운용 중이다.
수풀투과 레이더는 저주파로 수풀을 투과해 수풀로 차폐된 지역을 탐지한다. 악천후에도 탐지가 가능하다. 경계탐지레이더는 수풀투과레이더와 작동 원리가 유사하며, 설치와 해체가 쉽고 가격이 저렴해 다수의 경계 취약지역에 선택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이동식 레일로봇 카메라는 즉각 접근하기 어려운 경사지에 레일을 미리 설치한 뒤 카메라를 메달아 놓은 형태다. 레일을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감시할 수 있다. 360도 회전이 가능하며 열화상 기능도 있다.
AI TOD는 TOD에 AI 기술을 접목, 사람과 동물 표적을 자동으로 인식하는 체계다. 현재는 TOD 운용병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어서 보조적으로 쓰이지만, 알고리즘이 고도화되고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된다면 인식률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방위사업청은 GOP과학화경계시스템 경미한 성능개량 사업을 추진, 연내에 전력화할 예정이다.
해당 사업은 동부전선 산악 및 해안 경계 담당부대의 감시카메라 및 통제시스템의 노후화에 따른 오경보 등 탐지능력 저하로 발생하는 경계취약점을 조기에 보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 과학화경계시스템보다 AI 영상분석 기능 및 탐지능력이 향상된 주·야간(열영상) 감시카메라 등 최신 기술이 적용된 통제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하지만 철책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시스템 개선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국방연구원(KIDA) 양혜령 선임전문연구원과 이현무 전문위원은 ‘국방 과학화경계시스템의 한계점 및 개선방안’ 보고서에서 “현재의 철책은 Y지가대 기둥과 격자형 판망으로 구성돼 월책 시 손잡이 또는 지지대 역할을 하며 하중 지지가 쉽다”며 “판망은 절단이 가능하고 지형 및 도구를 활용하면 쉽게 극복 가능한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철책 개선으로 월책에 걸리는 시간을 지연시키거나, 월책을 어렵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며 GOP과학화경계시스템과 철책 사업을 통합 관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연천=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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