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던 문학 세포를 깨우다…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 채 태어난 소년. 크고 작은 선의를 받으며 자라 다섯 딸의 아버지가 된 그는 석탄 양조장을 운영하며 부지런히 일한다.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수녀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처참한 몰골의 아이들. 크리스마스이브 날, 수녀원으로 배달 간 그는 석탄광에 갇힌 소녀를 발견하고 고민 끝에 집으로 데려가기로 한다.
중편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다산책방)이다.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지난해 11월 말 출간된 후 단숨에 각 서점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다. 출간 5개월 만에 8만4000권이 판매됐다.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56)의 소설은 “오랜만에 만난 아름다운 수작(秀作)”이라는 호평 속에 문학과 거리를 두고 있던 사람들까지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여진은 지금도 이어져 한 달에 1만 권씩 판매되고 있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문학은 죽었다”는 말은 구문이 된 지 오래지만, 좋은 작품은 독자들이 반긴다는 것을 입증한 소설이다.
이 책을 국내에 들여온 이승환 다산북스 콘텐츠사업3팀장(39)을 경기 파주시 다산북스에서 14일 만났다. 그가 속한 콘텐츠사업3팀이 담당하는 장르는 뜻밖에도 에세이였다. 그는 어떻게 이 소설을 찾아냈을까. 이 팀장은 “해외 책 리뷰 사이트들을 종종 들여다보는데 어느 날 이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며 웃었다. 그에게 문학청년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대학에서는 역사를 전공했다고 한다.
“이전에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어요. 당시 문학 독자들을 만나보니 책의 세계를 떠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들에게 선사할 작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소설을 계속 기웃거리게 됐죠.”
이 책은 2021년 현지에서 출간돼 영미권에서 큰 호평 속에 사랑을 받았다.
“권위 있는 해외의 한 리뷰 사이트에서는 만점을 줬더라고요. ‘키건은 낭비하지 않는 작가’라는 영국 문학평론가의 말도 인상적이었어요.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한국에는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했고요. 국내에 들여오고 싶어졌죠.”
2021년 11월 말, 판권 판매 상황을 확인해보니 계약을 진행 중인 국내 출판사는 없었다. 에이전시에서 소설 PDF를 받았다. 통상 작품에 대한 제안서를 받지만 이미 해외에서 출간된 책이어서 소설 PDF를 통째로 확보할 수 있었다.
“유명 번역가에게도 작품을 보여주니 ‘인생에 대한 통찰이 많이 느껴진다’고 했어요. 문학에 조예가 깊은 지인에게 물어보니 ‘작품성은 있지만 대중성은 없다’고 잘라 말하더군요. 예상한 반응이긴 했어요. 제가 문학적 소양이 있는 건 아닌데요, 이상하게 포기가 안 되고 혼자 끙끙 앓게 되더라고요.”
3주 동안 고민한 끝에 그는 회사에 출간을 제안했다.
“팀별로 담당 분야가 있지만 저희 출판사는 팀간 장벽이 높지 않아요. 자기가 맡은 분야가 아니어도 특정 책을 발굴한 편집자가 그 책을 만들어요. 실제 에세이는 저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에서도 많이 냈고요.”
이 팀장이 목표로 삼은 판매 부수는 1만 권이었다. 그는 “다산북스는 자기계발서 등 실용서를 주로 만드는데 출판사로서 작품성 있는 문학책도 내야한다”고 강하게 요청했다. 회의를 연 결과 다수가 “출간해 볼만하다”는 의견을 냈다. 하나의 큰 관문을 넘은 것이다.
“김선식 대표님이 ‘작가를 데려와야 한다’며 키건의 다른 작품도 들여오라고 하셨어요. 독자들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려면 한 권만으로는 안 된다면서요. 그렇게 해서 낸 게 중편 소설 ‘맡겨진 소녀’예요.”
‘맡겨진 소녀’(허진 옮김)는 아이가 많은 가난한 집의 소녀가 엄마의 출산을 앞두고 여름 동안 먼 친척 부부 집에서 지내는 이야기를 그렸다. 소녀가 한 번도 받지 못했던 보살핌을 받으며 사랑과 다정함을 서서히 느끼는 과정이 맑은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한데 해외 출판사와 최종 계약을 완료하기까지 1년이나 걸렸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는데 해외 출판사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게 더뎠어요. 그러는 동안 2022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자 조바심이 나더라고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번역을 진행하는 사이, 영화로 만들어진 ‘맡겨진 소녀’가 2023년 국내에서 개봉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맡겨진 소녀’를 지난해 4월 먼저 출간했다.
“영화 제목은 ‘말없는 소녀’였어요. 지난해 5월 개봉했는데 당시 블록버스터인 ‘범죄도시3’가 스크린을 휩쓸면서 ‘말 없는 소녀’는 별로 상영되진 못했어요.”
지난해 11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나오자마자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맡겨진 소녀’도 함께 주목받았다. ‘맡겨진 소녀’ 역시 판매량이 치솟으며 지난달까지 1년간 총 4만 2000권이 나갔다. 지금도 매달 7000권 가량 판매되고 있다.(기자도 지인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선물한 후 그에게서 “책을 다 읽고 곧바로 ‘맡겨진 소녀’를 사서 봤다”는 말을 들었다.)
“작품에 대한 평이 좋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키건의 작품은 ‘얻어 걸린’ 측면도 있지만, 정말 짜릿했죠.(웃음) 독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게 주효했어요. 김지운 감독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추천했고요.”
예리하게 벼려낸 문장은 담담한 서사 속에 주인공 펄롱의 심리를 치밀하게 짚어낸다. 애써 가정과 일터를 일궈온 펄롱이 부조리한 거대한 힘 앞에서 깊이 고민하는 과정은 인간 본연의 심성을 들여다보게 한다.
“작품의 힘이 크다고 봐요. 키건은 24년간 단 4권의 책만 냈을 정도로 글의 정수만을 뽑아 쓰는 작가예요. 일정 규모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작품’이 반향을 일으키는데 키건이 그런 글을 써요. 이런 작가가 진짜 저력 있는 ‘무서운’ 작가라고 생각해요.”
중편 소설로 길이가 짧은데다 난해하지 않아 읽기 쉬운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이 팀장은 분석했다. 독자들에게 단시간에 책 한 권을 읽었다는 ‘정신적 포만감’을 줬다는 것. 읽기는 수월하지만 거듭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만드는 재미도 크다. 이는 키건이 치밀하게 구상해 심어 놓은 장치다.
“키건은 풍경 등을 묘사한 장면이나 여러 대목마다 각각 의미를 담았어요. 홍한별 번역가가 ‘펄롱이 수녀원장과 차를 마시는 방의 구조가 궁금하다’고 물어보자 키건은 직접 방 그림을 그려서 보내줬다고 해요. 다만 키건은 ‘독자의 지성을 신뢰해야 한다’고 강조하기에 각주는 한국 독자가 알기 어려운 1985년 아일랜드 상황을 설명하는 정도로 최소화해 달았어요.”
추천사는 독자들에게 신뢰가 높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에게 요청해 작품성이 돋보일 수 있게 했다. 은유 르포작가의 추천사도 함께 받아 사회적 의미를 짚어냈다.
이 팀장은 “책 표지를 양장으로 만든 건 130여 페이지로 분량이 적어 ‘좀 있어보이게’ 하려 한 것”이라며 웃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킬리언 머피 주연의 영화로 나올 예정이다. (킬리언 머피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기차에서 ‘맡겨진 소녀’를 읽다가 너무 우는 바람에 후드를 뒤집어써야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맡겨진 소녀’는 소녀가 처음 사랑과 다정함을 느끼는 과정을 담백하면서도 세밀하게 묘사해 아련한 감정을 남긴다.)
이 팀장은 올해 7월 키건의 단편집 ‘푸른 들판을 걷다’를 낼 예정이다.
“반짝이는 작품을 캐내는 과정이 재밌어요. ‘문학은 안 된다’는 ‘문학 패배주의’를 깨는 것도 의미 있고요. 좋은 작품을 기다리는 분들에게 반길 수 있는 책을 계속 선사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다산책방·2023년)은….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 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 행위를 저지른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중편 소설이다. 다섯 딸을 둔 가장인 펄롱이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수녀원에서 참혹한 몰골로 학대당하는 아이를 보고 도움을 줘야 할지 고뇌하는 과정을 정교하게 풀어냈다. 수녀원과 맞서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펄롱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지만 자신을 임신한 가사 일꾼인 어머니를 해고하지 않은 미시즈 윌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삶을 떠올린다. 안전한 침묵과 파국이 예고된 용기의 갈림길 앞에서 번뇌에 휩싸이는 펄롱의 내면을 깊이 파고든다. 인간 본연의 심성에 대해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1985년 아일랜드 한 도시의 풍경과 소시민의 일상을 세밀화처럼 그렸다. 삶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한 문장은 공감을 자아낸다. 석탄 야적장을 운영하는 펄롱의 일과를 묘사하며 ‘야적장 정문에 도착했는데 자물쇠가 성에로 덮여 꿈쩍 않는 걸 보고는 삶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침대 속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같은 문장이 그 중 하나다. 담담하게 묘사된 장면에도 하나하나 의미를 담아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하게 만든다.
파주=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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