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선비처럼 영주 나들이
(시사저널=글 남혜림·사진 신규철)
만물이 생기를 품은 날, 봄볕을 품은 경북 영주를 거닐다 전통문화와 살아 있는 역사를 마주했다.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석양에 피었고/ 버드나무와 향기로운 풀은 가랑비에도 푸르구나/ 칼로 재단해 내었는가, 붓으로 그려 내었는가?" 조선 시대 문인 정극인이 지은 가사 '상춘곡' 중 일부다. 노래처럼 눈 닿는 모든 곳이 꽃과 잎으로 그린 그림 같은 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바깥이 궁금해 여장을 꾸렸다. 곧바로 KTX를 타고 경북 영주로 향했다. 풍기역에 내리자 주위에 고즈넉한 정취가 흐른다. 마침 굼뜨게 흐르는 구름이 볕을 살짝 가려 주어 걷기에 쾌적하다. 깨끗하고 강직한 선비 정신이 스민 고장을 탐험하러 가는 길, 설렘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전통과 만나는 테마파크, 선비세상
첫 번째 목적지는 2022년 9월에 문을 연 영주의 새로운 랜드마크 선비세상이다. 풍기역에서 자동차를 탄 뒤 북쪽으로 10분 정도 달려 도착했다. 이곳은 96만 제곱미터(약 29만 평) 넓은 부지에 선비와 전통문화를 주제로 테마파크를 조성해 입고, 먹고, 듣고, 즐기며 선비의 가치와 정신을 체험하도록 했다. 입구부터 단아한 기와집과 초가가 흙길을 따라 늘어섰다. 한옥·한복·한식·한지·한글·한음악 등 총 여섯 개 테마로 나눈 공간을 자박자박 누빈다. 가장 먼저 한옥촌이 손님을 맞는다. 대문을 넘어 기와집으로 들어가자 안내 음성이 들려오는데, 센서가 사람을 감지해 공간을 설명하는 음성을 재생하는 방식이다. 전통 문양을 조명한 기획전시실에서 문양에 담긴 옛사람의 소망을 헤아리고, 선비다례원에서는 다도 과정을 엿본다. 이처럼 각 촌마다 문화관, 공방, 놀이방 등에 전시나 미디어아트, 인터랙티브 콘텐츠로 내용을 알차게 꾸렸다. 한국 전통문화를 새로운 시선으로 느끼고 바라보게 한다.
거대한 미디어아트도 인상적이지만 선비세상에서 꼭 감상해야 할 것은 한복촌에 놓인 삼일유가 오토마타다. 길이가 18미터나 되는 오토마타 인형극에 영주 도령이 장원급제해 선한 관리가 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담았다. 방송인 김태균의 내레이션에 맞추어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인형의 모습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한복 입기, 음식 만들기, 한지 뜨기 등 체험 프로그램 역시 다채롭다. 그중 한지 뜨기 공방에서 진행하는 체험에 참여해 본다. 한지 재료인 닥나무 풀과 물을 잘 섞어 지통에 담아둔 것을 발로 떠내는데, 발에 붙은 섬유를 판판한 곳에 두어 모양을 잡은 후 물기를 빼고 바짝 말리면 하얗고 질긴 한지가 탄생한다. "우아, 정말 이게 종이가 되나요? 여기 구름이 뜬 것 같아요!" 큰 지통에 몸을 기댄 아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체험에 임한다. 완성한 한지는 가지고 갈 수 있다. 체험자들은 한지를 이리저리 살피고 쓰다듬다 조심스레 가방에 챙겨 넣는다. 흔히 쓰는 공책보다 거칠어도 이곳에서의 기억이 담겼으니 어떤 종이보다 특별하게 느껴질 테다.
테마파크가 넓은 만큼 방문객을 배려해 쉼터까지 세세하게 신경 썼다. 길목 중간중간에 놓인 정자에 바둑, 오목, 알까기처럼 소소하게 즐길 거리를 두어 다리를 쉬는 동안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선비광장에도 자유롭게 전통놀이를 경험하도록 윷놀이, 투호를 두어 이따금 주위가 시끌벅적해진다. 아이는 나무통에 화살을 넣으려 안간힘을 쓰고, 보호자는 아이의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다. 정답고 사랑스러운 풍경에 덩달아 웃음이 지어진다.
극락에 오르는 길, 부석사
발길의 방향을 소백산 쪽으로 돌린다. 봉황산 초입, 커다란 일주문이 두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은행나무길을 거쳐 중턱에 다다르자 점차 소음이 잦아들어 때때로 새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고요하고도 신비로운 정취를 음미하다가 눈앞에 놓인 천왕문을 보고 잠시 멈추어 마음을 가다듬는다. 아득한 옛날, 의상대사가 화엄종을 펼쳤다는 절이 문 너머에 있다.
때는 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화엄을 공부할 요량으로 당나라로 건너간다.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무르던 대사는 신도의 딸 선묘에게 사랑 고백을 받지만 불심에 이를 거절한다. 굳은 의지에 감복한 선묘는 영원히 제자가 되어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올린다. 이것이 진심이었는지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해룡으로 변했고, 급히 신라로 귀국하게 된 의상대사의 배를 보호했다고 전한다.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사가 문무왕의 명에 따라 사찰을 건립하려던 때도 선묘룡이 나타난다. 봉황산에 알맞은 터를 발견해 건물을 세우려 하자 그곳에 살던 무리가 비키지 않았다. 이에 선묘룡이 큰 바위를 공중에 들었다 놓아 부처의 힘을 보인다. 놀란 무리는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결국 무사히 절을 지었다. 앞선 이야기에 등장한 절이 바로 부석사다. 떠 있는 돌이라는 뜻을 품었는데, 이 역시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천왕문을 넘고 삼층석탑 두 기를 지나며 흥미로운 창건 설화를 곱씹는다. 뒤편에 놓인 범종루 가까이 간다. 1747년 재건했다는 누각 2층에는 붉은 여의주를 문 목어, 운판, 불심법고(??)가 자리한다. 범종은 바로 옆에 따로 종각을 지어 달았다. 3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위엄은 그대로다. 아침저녁으로 여전히 타종을 행한다는 사실에 감탄만 나온다. 부석사의 백미,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길은 특이한 구조다. 안양루 밑에서 계단을 올라 진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닦아 올린 것
시야에 들어차는 석등과 무량수전을 두고, 우선 뒤를 돌아 세상을 천천히 굽어본다. 자목련, 목련, 산수유, 막 피기 시작한 철쭉으로 발아래가 꽃 천지다. 시선을 멀리 두면 겹겹이 솟은 소백산 자락이 아른거린다. 산 아래는 중생의 공간, 절 초입은 도를 닦는 불자들의 공간, 무량수전이 자리한 곳은 부처의 세계로 여겼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친다. 이곳을 극락이라 칭한 이유를 단번에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인다.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부석사는 설화뿐 아니라 국보 다섯 점, 보물 아홉 점도 보유했다. 미뤄 놓았던 무량수전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유려한 곡선이 도드라지는 팔작지붕, 고려 시대 공민왕이 썼다는 현판, 이름 높은 배흘림기둥까지 하나하나 뜯어본다. 여러 번 고쳐 신라 시대에 지은 그대로는 아니지만 1376년, 고려 시대에 세운 목조 건물을 현대인이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치밀하고도 세심한 설계는 비단 무량수전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절을 구성하는 건물이 차례로 드러나도록 한 점, 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방해하지 않도록 범종루 지붕 후면을 맞배지붕으로 놓은 점 등이 부석사를 더욱 빛나게 한다.
이제 마음을 경건히 하고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간다. 한 걸음 내딛는 일조차 조심스러워 문지방을 넘을 때 괜히 호흡을 멈추었다.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몸으로 감각하는 순간. 내부에서 황금빛 소조여래좌상과 마주한다. 아무 말 없는 불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모으고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공기, 조용한 법당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사색했다.
잡념이 사라져 한결 가벼운 몸을 이끌고 나와 팔각 석등 옆에 선다. 어느새 기울기 시작한 해가 타오르는 모습을 본다. 몇 번이고 무량수전을 비췄을 석양볕이 나무 기둥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의상대사의 가르침이 여전히 남아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듯 부석사는 내일도, 모레도 같은 자리에서 뜨고 지는 해를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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