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과 제작자, 누가 아티스트인가
4월25일 저녁 일을 혹자는 2008년 ‘그 기자회견’에 견준다. 욕설과 눈물이 엉긴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에서 가수 나훈아씨의 16년 전 ‘바지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흉흉했던 여론을 바꿨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 한 매체는 나훈아씨의 기자회견을 두고 “땅에 내려왔던 셀러브리티(유명인)가 다시 하늘로 올라간 별이 되었다”라고 썼다. 민희진씨도 셀러브리티가 되었다. 배임 의혹을 받던 소속사 대표에서 일약 “개저씨”에 맞선 여성 경영인, 아티스트를 살뜰히 챙긴 ‘엄마’로 떠올랐다. 그런데 그 결과, 민 대표가 제작한 아이돌그룹 뉴진스가 흔들렸다.
민희진 대표의 다소 ‘거친 입’을 걷어내고 보면 이번 일은 단순하다. 모회사 하이브와 자회사 어도어 대표 사이 갈등이다. 하이브는 민희진 대표가 모기업에서 독립하고 뉴진스를 빼돌리기 위해 위법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민 대표는 그게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하이브가 뉴진스 활동을 방해했다고 반박한다. 하이브의 또 다른 자회사 빌리프랩 소속 아이돌그룹 아일릿이 ‘뉴진스 스타일’을 모방했다는 주장도 폈다. 하이브는 민희진 대표를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진실 공방은 수사와 재판으로 가려질 예정이다(〈시사IN〉 제869호 ‘민희진 ‘본인 등판’ 뉴진스의 미래는?’ 기사 참조).
업계는 대중보다 덤덤한 반응이다.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 관계자는 “민희진 대표와 하이브 사이 갈등설은 이전부터 파다했다. 놀라웠던 건 기자회견 방식뿐”이라고 말했다. 민희진 대표가 2019년 하이브(당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했을 때부터 업계 관계자들은 ‘화학적 결합’에 의구심을 품었다. 민희진·방시혁(하이브 의장)의 캐릭터와 SM·빅히트의 조직문화 차이 때문이다. 이 관계자의 말이다. “모든 회사가 그렇지만 SM과 하이브도 문화가 몹시 다르다. 실권이나 역할 분담 차이도 크다. 게다가 민희진 대표는 아이돌 이미지를 담당하는 비주얼 디렉터 출신 기획자이고, 방시혁 의장은 작곡가 출신 프로듀서다. 음악과 그룹을 보는 시선이 다르다. 마침 둘 다 캐릭터가 세고, 각자 크게 성공했다. 실제로 얼마 지난 뒤 마찰 소문이 돌더라.”
이 관계자가 보기에 파국의 근원은 공로에 대한 평가절하다. ‘업계에 양아치가 많다’는 민 대표 말에 공감하는 동료들이 많다고 말했다. “실무자가 애정을 담아 기획한 소속 아이돌 그룹이 잘돼도 회사는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네가 잘한 결과가 아니라 어차피 잘될 애들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나왔으니까 성공한 거다’라는 생각을 내비친다.” 민희진 대표는 예외적 경영자의 특별한 결단을 경험한 바 있다.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당시 총괄프로듀서가 젊은 평사원 민희진에게 큰 실권을 맡기고 이름이 알려지게 했다. 이적 후 뉴진스를 히트시킨 그는 하이브와 방시혁 의장으로부터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매도당했다고 주장한다.
민희진 대표의 공로는 무엇일까. 그와 어도어는 뉴진스의 ‘오리지널리티(고유성)’를 주장한다. 민희진 대표의 첫 공식 입장문은 4월22일 나왔다. 민 대표는 ‘아일릿의 뉴진스 카피 사태’가 갈등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하이브의 자회사 소속 아일릿이 “헤어, 메이크업, 의상, 안무, 사진, 영상, 행사 출연 등 연예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뉴진스를 카피하고 있다. 아일릿은 ‘민희진풍’ ‘민희진류’ ‘뉴진스 아류’ 등으로 평가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하이브가 보복성 조치로 민 대표를 몰아내려 한다는 것이다.
“‘민희진 스타일’ 특별한 건 맞지만…”
뉴진스가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데에는 대체로 의견이 모인다. 2021년 책 〈여신은 칭찬일까?〉에서 여성 아이돌의 특성에 대해 쓴 최지선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뉴진스는 데뷔 때부터 대부분 여성 아이돌과 좀 달랐다. 주된 타깃이 10대고, 특히 여성 팬이 좋아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멤버 모두 긴 생머리를 한 것도 특이했다. 화려하고 에너지 넘치는 이전의 케이팝과는 음악 스타일 차이가 났다. 상대적으로 느리고 듣기 편한 음악을 들고 왔다.” 김윤하 평론가는 ‘민희진풍’이 케이팝 내부에서 통용되는 개념이며 뉴진스가 그 정점이라고 말했다. “민희진씨는 최소 10년 이상, 모두가 알아보는 어떤 스타일을 쌓아왔다. 청춘의 맑고 선명한 순간을 케이팝 애호가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내보이는 독보적 감각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아일릿이 뉴진스를 베꼈다’ ‘하이브가 민희진의 것을 빼앗았다’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뉴진스가 ‘게임체인저’는 맞다. 그런데 누군가 유행을 선도하면 원래 다들 따라 하기 마련이다(최지선).” “대중문화 특성상 완전한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하기는 매우 어렵다(김윤하).” 평론가들이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뉴진스 스타일의 고유성을 부정해서가 아니다. 맥락상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오랜 기간 한국 아이돌 산업은 ‘꼭두각시 놀음’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연예기획사에 발탁돼 타인이 쓴 노래와 춤을 수행하는 이들을 과연 예술가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팬덤과 평단은 ‘협업’이라고 반박한다. 이들은 아이돌 공연을 연기에 빗댄다. 작가의 대본과 감독의 지시에 따르더라도 배우 개인의 고유한 재해석이 가미된다는 것이다. “춤을 추고 노래하는 사람들도 특정 부분의 장인이고,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설령 어떤 곡을 원곡자의 창작 의도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구현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건 가수 자신의 노래다(최지선)."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은 아이돌 산업의 버팀목인 ‘협업론’을 흔든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민희진 스타일’의 독창성이 뉴진스의 성공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듯한 발언을 누차 했다. 협업론에 따르면 아이돌 아티스트의 고유한 퍼포먼스는 복제될 수 없고, 설령 누군가 따라 하더라도 ‘원본’의 가치는 하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 대표는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카피가 나오잖아? (…) 이전에 있던 우리 브랜딩이 기성화가 돼요. 우리의 유니크함이 기성화가 된다고. (…) 그러면요, 다 100(퍼센트) 다 모두 뉴진스 돼. 그럼 뉴진스한테도 나쁘고 얘네들(따라 하는 그룹)한테도 나빠요. 장기적으로 이게 업을 망가뜨린다니까요?” 이 인식에 따르면 아이돌 그룹의 고유한 예술성은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결과물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다. 아티스트의 개성은 충분히 복제할 수 있다. 상도덕을 지키는 업계 관계자들 덕에 보존될 뿐이다.
궁지에 몰린 민희진 대표가 케이팝이라는 문화예술의 성질을 왜곡하는 것일까? 업계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경험한 그의 판단이 오히려 현실론일지도 모른다. ‘협업을 통한 예술’ ‘콘셉트 예술’이라는 발상은 현대 예술계에 100년 이상 뿌리내린 사조다. 그럼에도 한국 아이돌 산업이 ‘공장식’이라는 비판은 멎지 않는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과를 거머쥔 뒤에도 지난해 BTS의 RM은 “케이팝의 놀라운 성과가 아티스트를 비인간화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국내 매체 다수는 “황당”하고 “무례”한 질문이라고 쓴 뒤, “그게 케이팝을 빛나게 한다”라는 RM의 답변 일부만 소개했다. “소속사는 내 답변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그렇다고 본다”라는 앞의 말은 그만큼 보도되지 않았다.
분업과 전문성, 아티스트 공간 어디에
케이팝을 경영학의 관점으로 보는 시각은 민 대표의 말에 힘을 싣는다. 세계적 인기몰이를 프로듀서들의 혜안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이장우 경북대 명예교수(경영학부)는 책 〈K-POP 이노베이션〉에서 케이팝의 성공이 문화와 기술의 결합 덕이라고 썼다. 방점은 문화보다 기술에 찍혔다. 문화예술은 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성에 기대지만, 기술은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혁신이 가능하다. 이 교수에 따르면 케이팝은 “개별 아티스트나 개인 프로듀서 중심의 문화예술 영역에서 벗어나 컬처 테크놀로지라는 개념을 도입해 세계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다양한 아이돌을 생산하고 소비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혁신의 목표는 “체계적인 반복 생산”이며, 혁신가로는 이수만, 방시혁 등 프로듀서들을 꼽았다.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마케팅 등 프로듀서들이 이룩한 혁신을 묶어 ‘아이돌화’라고 부른다. 책에서 이 교수는 케이팝의 혁신이 똑같은 것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장식’과 조금 다르다고 쓴다. 제각기 다른 “농작물을 키워서 산출하거나, 요리와 같은 필요 기술을 활용”하는 데 가깝다.
혁신 결과, 아이돌 개인의 창의성이나 천재성과 그들의 성공 간 상관관계가 그리 강하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각종 시장조사와 시행착오를 거친 업계 전문가들은 창작 능력보다는 “비주얼(외모)이 입덕(팬이 되는 것) 1순위”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고도의 분업과 전문성이 완성도를 높인다는 결론도 내렸다. 전문 작곡가와 전문 안무가, 전문 프로듀서의 오더는 아이돌 개인의 재해석 여지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막대한 인력과 자본이 투입되기에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했다. 음악적 재능이 있더라도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의지가 약한 연습생은 데뷔시키지 않는다. 대형 기획사는 이들을 대체할 만큼의 연습생 ‘풀’을 상시 갖추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총괄하고, 그렇게 성공의 정점에 선 인물이 민희진 대표다. 그는 뉴진스 데뷔와 활동 과정 전반에 절대적 영향력을 끼쳤다. 기자회견에서 민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선발할 수 있는 친구가 민지밖에 없었다. 나머지 친구들은 연습이 더 필요하거나 나이가 너무 많거나 나랑 결이 조금 안 맞아서. (…) ‘우리 걸그룹이 추구하는 어떤 방향성을 오디션에도 넣어서 브랜딩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선발) 했다. (…)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방)시혁님이 갑자기 전화하셔서 ‘희진님, 나 무슨 음악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콘셉트 생각하신 것 있냐’ 그랬다.” 방향도, 선발도 민희진 대표의 ‘결’이 정했다. 음악은 방시혁 의장과 논의하다가 독자적 방향을 따랐다. 이 서사에서 뉴진스의 예술적 주체성은 보이지 않는다.
민희진 대표는 ‘에미(어미)’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뉴진스는 ‘애들’이며, 그들의 성공은 ‘민희진 스타일’의 산물이다. 그것을 복제해 다른 아이돌에게 입히면 뉴진스의 독창성은 곧장 흔들린다. 역설적이게도 뉴진스를 보호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공로를 강조하고 뉴진스의 개별성을 깎아내리며 하이브를 규탄했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아티스트를 연기하던 이들은 그날 울먹이는 10대 아이가 되었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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