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헛발질 막을 ‘레드팀’이 안보인다
직구 금지 이어 고령자 운전제한까지
정책 부작용 점검팀 없어 혼선 계속
“대통령실-정부 정무기능 강화 필요”
국가통합인증마크(KC) 없는 해외 일부 품목의 직접구매(직구)를 금지하겠다는 정책이 사흘 만에 철회된 데 이어 고령자의 운전자 자격 제한 정책 발표를 둘러싸고도 혼선이 이어지면서 정부의 정책 조율 능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여권에서는 정부 내 레드팀(Red Team)의 부재 때문에 정책 혼선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레드팀은 ‘헛발질 정책’ 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역풍과 부작용을 점검하기 위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는 조직을 뜻한다. 정책 추진에 따른 파장을 예상하고 대응할 정무 역량을 갖춘 인사들이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들에 부족한 탓에 정책 리스크 대응 능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22일 여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통령실과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대로 된 레드팀 역할을 하는 조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주 69시간 근무’ 논란 이후 대통령실 내에서 정책 조정 기능 강화 필요성이 거론됐고 이후 정책실장 신설 등으로 기능을 보강했지만 레드팀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지난해 국정기획수석비서관실 소속 젊은 행정관들에게 정책에 대한 다양한 여론을 청취하고 의견을 내는 역할을 맡긴 적은 있다. 여권 관계자는 “젊은 행정관들이 의견을 내면서 비공식적으로 일종의 레드팀 역할을 한 측면도 있다”면서도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나 의견을 들어보자는 차원이었다”고 했다. 최근에는 젊은 행정관들의 목소리를 듣는 분위기도 약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부처에도 레드팀이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국무조정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해외 직구 종합 대책 태스크포스(TF) 내에서 ‘소비자의 반발이 예상된다’는 우려가 나왔음에도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한 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은 “소관 부처가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면서 레드팀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여당 의원은 “정책 의사 결정 과정의 경직화 분위기가 정부 여당을 휘감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고 했다.
정책 엇박자는 공매도 재개를 두고도 드러났다. 최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6월 중 공매도 일부 재개’를 시사한 뒤 시장이 들썩이자 대통령실은 22일 “불법 공매도 해소, 투자자 신뢰 시스템이 갖춰질 때까지 공매도를 재개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레드팀 |
조직 내부에서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고, 조직을 혹독하게 검증하는 선의의 비판자 역할을 하는 팀. 의사 결정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역풍 등을 미리 점검하는 기능을 한다. |
정책리스크 대응 전문가 없어… “제 기능 못하는 정무 복원 시급”
[정책 혼선, 구멍난 대응체계] ‘레드팀’이 안보인다
추경호 “당과 정책협의 촉구” 당일… 정부, ‘고령자 운전자격 제한’ 발표
국조실 “직구금지, 홍보 가능한 이슈”… 보고 받은 대통령실, 정무 판단 놓쳐
與지도부 잦은 교체, 당정 소통 약화
국가통합인증마크(KC) 인증을 받지 않은 80개 품목의 해외 직접구매(직구) 금지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가 20일 오전 “정부는 국민 민생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정책 입안 과정에 당과 충분히 협의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음에도 국토교통부와 경찰청은 여당과 협의 없이 당일 오후 고령자 운전자격을 제한하는 취지의 정책을 발표했다.
● 국조실, 대통령실에 “해외 직구 금지는 홍보 이슈”
22일 여권에 따르면 정부 정책을 둘러싼 혼선이 계속되고 있는 구조적 원인으로 레드팀(Red Team) 부재와 함께 정책 추진에 따른 영향과 파급력을 두루 살필 정무 역량을 겸비한 인사가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에 부족한 것이 꼽힌다. 국민 여론이나 예상 반응, 정책의 부작용이나 역풍 가능성을 정책 구상 초기부터 살펴봐야 하는데 이런 인력과 시스템이 부족해 정책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대통령실 관계자는 “지난해 주 69시간 근무 정책 발표로 불거진 논란으로 정책 리스크 대응 필요성을 대통령실이 절감했다”며 “이 시기 윤석열 대통령이 위기 대응을 적극적으로 하라고 주문해 시스템 개편도 이뤄졌다”고 말했다. 정책 조정 기능 강화를 위해 대통령실에 입성했던 이관섭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국정기획수석비서관을 맡던 때다. 한 관계자는 “이 시기 정책 리스크 대응에 어느 정도는 체계가 잡혔다”면서도 “4·10총선 국면과 이후 대통령실 내 참모 교체가 이어지는 등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측면이 있다”고 했다.
정부 내부에서는 정책 총괄·조정 역할을 하는 국무조정실이 정책 수립 과정에서 정무적 판단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해외 직구 정책 철회 사태에선 TF 협의부터 발표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미인증 제품 직구 금지’라는 단정적 표현 사용을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던 점이 아쉽다”며 “정책 위험 요인에 대한 분석만을 담당하는 인원을 두는 등 정책이 어떻게 수용될지 정무적 완성도를 높여야 할 시점”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개별 부처 실무자에게까지 정무적 판단을 요구하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의 조급함도 정책 혼선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부 관계자는 ‘해외 직구 정책 철회’ 논란과 관련해 “정부가 국민 안전에 손놓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안전 대책을 빨리 내놓으려다가 시간에 쫓겨 설익은 정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 “여당 정책 조정-정무 판단 기능도 약화”
여당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준석 초대 당 대표부터 최근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까지 9차례 지도부가 바뀐 것이 당정 간 소통과 정책 조정, 정무 조정 기능 약화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2022년 5월 정부 출범 후 2년간 여당은 4차례의 비상대책위원회를 거치고, 권한대행 직무대행 체제를 5차례 겪는 등 당 지도부 와해 및 재구성을 수시로 겪었다. 이런 과정에서 당정 정책 조정을 총괄하는 정책위의장도 여러 번 교체됐다. 당정 간 소통 연속성이 자연스럽게 약화됐다는 것이다.
당정 소통 상황을 잘 아는 한 전임 지도부 관계자는 “그립을 쥐고 정부에 압박하고 군기도 잡을 정책위의장이 계속 바뀌는데 정책위에서 무슨 힘이 생기겠느냐”며 “정부가 만약 당의 눈치를 살폈다면 이런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총선 참패 이후 당 지도부 공백 사태를 겪다 황우여 비대위가 출범하기까지 기간 동안 당정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문제점이 노출되자 새 원내지도부는 당정 소통 강화에 역점을 두기로 했다. 정책 조율을 위한 부처 장관과의 면담을 확대하고 당 정책조정위원회(정조위) 기능을 강화하기로 했다. 당 관계자는 “그동안 정부가 너무 편하게 일을 했다”며 “이제부터는 직접 장관이나 부처 사람들이 와서 정책을 설명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조위의 경우 22대 국회 개원 이후 국회 상임위원회가 구성된 뒤 활동할 수 있어 한동안 공백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이상헌 기자 dapaper@donga.com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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