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청소년 문제 해결할 협력자들을 기다립니다”
보호받아야 할 나이에 보호자가 된 아이들이 있다. ‘영케어러(Young Carer)’는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가족이나 친척을 간병하거나 돌보며 생활하는 아동·청소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국, 호주, 미국 등에서는 국가 차원의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지만 한국에는 영케어러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도, 지원체계도 없다.
지난 9일 만난 황영기(72) 초록우산 회장은 이들을 ‘가려진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 조부모, 형제자매를 돌보는 아이들을 효자·효녀라 부르며 기특해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아이들에게 미뤄놓고 외면한 셈이죠.”
한국에 살지만 한국말을 못 하는 이주배경아동, 온라인 도박의 덫에 걸린 청소년 문제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황영기 회장은 “가려져 있던 문제들을 꺼내 세상에 알리는 일이 초록우산 같은 대형 비영리단체의 책무”라면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협력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변화를 만드는 방법
-대형 단체의 책무라는 말이 왠지 반갑네요.
“초록우산은 연 3000억 원 가까운 예산을 집행하는 대형 단체입니다. 전통적인 아동복지 사업은 누구보다 잘하고 있지만, 우리 단체의 일만 근면 성실하게 챙기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규모에 맞는 더 큰 차원의 ‘소셜임팩트’를 생각하고 행동해야죠.”
-예를 들자면요.
“소셜임팩트는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정책과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해요. ‘여기에 이런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하고 문제를 제기한 뒤에 필요한 정책과 법 제도가 마련될 수 있게 정부를 설득하는 역할까지 초록우산이 하려고 합니다.”
-전략적인 접근이네요.
“그렇죠. 같은 맥락에서 올해 새로 시작한 게 있어요. 매년 5월에 초록우산이 ‘아동행복지수’를 발표합니다. 아이들에게 10분 단위로 자기 행동을 기록하게 한 뒤에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어떨 때 행복감을 느끼는지 분석하는 작업을 하죠. 예전에는 대상자가 500~1000명 정도에 불과했고 지역별로 균형 있게 표본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정책 자료나 연구 자료로 쓰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판을 키웠습니다. 대상자를 전국 17개 시도에 골고루 분포시켰고 참여 인원도 1만 140명으로 늘렸어요.”
-의미 있는 데이터가 나왔겠네요. 어떻게 활용할 예정인가요.
“전남과 경북의 아동행복지수는 어떻게 다른지, 더 세부적으로는 강남 3구와 비강남권은 어떻게 다른지까지 분석이 가능해졌어요. 지난 어린이날에 간단한 결과만 공개했는데 앞으로 세부 내용을 기반으로 학술 대회와 정책 세미나를 개최하려고 해요. 특이점들을 찾아낸 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각 지자체장, 교육감, 교사들과 함께 논의해 나갈 예정이에요. 분석 결과를 정리해 직접 정책 제안도 할 겁니다.”
-사각지대에 놓인 아동·청소년들이 많은데요. 사안의 심각성과 달리 정책적으로는 후순위로 밀린다는 느낌이 듭니다.
“대표적인 게 영케어러라고 불리는 가족돌봄아동 문제예요. 저는 이 문제가 빠른 시간 내에 구조적으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족돌봄아동 지원법’이 제정될 수 있게 올해도 계속 활동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또 어떤 문제들이 시급한가요.
“이주배경아동 문제가 있죠. 우리나라 출생 아동 수는 줄고 있지만 이주배경아동 수는 늘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잘 자랄 수 있게 언어 문제와 학습 격차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해 줘야 해요. 또 온라인상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온라인 세이프티’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올해 1월 미국 상원 법사위가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와 추지 추 틱톡 CEO를 불러 호통을 쳤어요. ‘당신들 플랫폼에서 어린아이들이 위험한 콘텐츠에 노출되고 거래에도 이용되고 있다. 막을 수 있는 수단과 재력이 있는데도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고요. 기업인들이 그 자리에서 사과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새로운 협력과 기부를 꿈꾸며
황영기 회장은 삼성증권 대표, 우리금융지주와 KB금융지주 회장, 금융투자협회장을 지냈다. 2022년 8월 제10대 초록우산 회장으로 취임했고 2023년 2월에는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이사장을 맡았다.
-회장 취임 후 2년간 혁신적인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이름을 ‘초록우산’이라고 바꾼 것도 그렇고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라는 이름이 길잖아요. 요즘은 다 줄여서 이야기하는 시대니까 브랜딩을 위해서 짧게 줄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린이재단이라는 이름이 사업 영역을 제한다는 느낌도 있었고요. 실제로 이주배경아동, 자립준비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상자 중에는 중고생도 많고 20대 후기청소년들까지 포함돼 있어요.”
-올해 처음 시작한 ‘아동·청소년 분야 비영리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사업’도 궁금합니다.
“다음세대재단과 함께 진행하는 사업이에요. 아동·청소년 분야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비영리스타트업을 선발해서 지원해 주는 사업이죠. 설립 전 단계의 극초기 팀도 지원합니다.”
-신생 단체의 성장을 돕는 이유가 있겠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비영리단체들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모금이 안 돼요. 좋은 아이디어와 솔루션을 가지고도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초록우산은 이 길을 먼저 걸어온 선배 단체로서 후배 단체들의 후원자가 돼주려고 합니다.”
-대형 단체의 책무인가요.
“대형 단체의 책무인 동시에 소셜임팩트를 확장하기 위한 전략이죠. 초록우산 혼자서 아동·청소년 분야의 모든 난제를 해결할 수가 없잖아요. 전문성과 혁신성을 가진 다른 단체들과 협력하면 더 큰 임팩트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이사장으로서 업계 전반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 같아요.
“기부 문화 활성화가 가장 큰 고민이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니까요. 영케어러에게 필요한 시간이 하루 4시간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공부든 놀이든 할 수 있는 4시간의 자유를 주려면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대한민국에 아직 가족을 돌보는 아이들이 있어? 얼마면 해결할 수 있어?’ 하며 나서는 큰 기부자가 나타나면 좋겠어요.”
-빌 게이츠가 9조 원을 투입해 지구상에서 소아마비를 종식한 것처럼요.
“‘빅벳 필란트로피’라고 하죠. 하나의 사회문제에 집중하며 큰돈을 내놓는 기부가 한국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경기도 지역에 이주배경아동을 위한 특별한 학교를 지어줄 수도 있겠죠. 한국어 수업도 하고 보충 수업도 해주고 한국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형태로요. 사회문제 해결에 진심인 기업, 고액 기부자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초록우산에는 58만 명의 ‘초능력자’가 있다. 아이들을 돕는 마음을 가진 정기 후원자들을 ‘초록빛 능력자’라는 뜻에서 초능력자라고 부른다. 황영기 회장은 “기업이나 부자들의 통 큰 기부도 중요하지만 모든 국민이 1년에 적어도 한번은 기부에 참여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 모두 초능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꿈같은 일이라고요? 계속 떠들다 보면 언젠가 이뤄지겠죠(웃음).”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자유롭게 한국 말 하면, 원하는 외국어로 즉시 통·번역
- 尹 대통령에게 필요한 트럼프와 아베의 ‘브로맨스’
- [이별전쟁] 자산 수백억 모은 뒤, 이상해진 아내… “내일 사랑해줘” 통화가 녹음됐다
- 대구가 아녜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가 나는 곳
- 자유통일당도 맞불 집회… 서울 주말 ‘시위 지옥’ 연말까지 이어져
- 北 도발 가정 ‘현무-2′ 실사격 훈련
- 韓, 확전 자제하고 ‘행동’ 요구… 용산도 ‘인적 개편’ 본격 시작
- 중국차의 폭주에 일본차도 치였다
- [바로잡습니다] 7일 자 A14면 ‘입동 맞아… 겨울옷 입는 낙안읍성’ 사진 설명에서
- [팔면봉] 野, 尹 대통령 임기 단축 改憲 주장….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