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찾은 ‘종이팩 재활용’ 솔루션
초록열매 종이팩 컬렉티브
“열심히 씻고 말려서 버렸는데 재활용이 안 된다고?”
2019년 광주. 김지현씨는 이제껏 ‘종이류’로 분리배출한 종이팩이 재활용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종이팩은 코팅된 종이라서 재활용 공정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종이팩을 재활용하려면 따로 모아 행정복지센터에 가져다주는 수밖에 없었다. 좀 억울했지만 곧바로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동네에서 나오는 종이팩들을 싹 다 모아 재활용 해볼까?”
지현씨는 친구 이세형씨와 계획을 세웠다. 종이팩을 많이 사용하는 ‘카페’를 중심으로 수거하기로 했다. 첫째, 카페에서 종이팩을 잘 헹궈서 말려 놓는다. 둘째, 마을 주민 누군가 정기적으로 방문해 수거한다. 셋째, 수거한 종이팩은 정해진 거점 공간에 모아뒀다가 일정량이 모이면 행정복지센터에 가져가 화장지로 교환한다. 넷째, 교환한 화장지는 마을에 필요한 기관에 전달한다.
시민 아이디어를 지원하는 공모사업이 때마침 두 친구의 눈에 띄었다. 재단법인 숲과나눔이 진행하는 ‘풀씨’ 사업이었다. 둘은 ‘카페라떼클럽’이라는 팀명으로 응모해 최종 선정됐다. 카페라떼클럽의 아이디어는 풀씨의 지원으로 현실이 됐다. 그해 가을 광주 양림동, 도산동, 송정동에 있는 카페와 베이커리 21곳에서 5주 동안 4000팩을 모았다. 종이팩을 행정복지센터에서 화장지 120롤로 교환해 지역아동센터에 기부했다.
시민의 작은 아이디어 전국으로 퍼지다
카페라떼클럽은 이 모델이 다른 마을에서도 작동할지 궁금했다. 2020년 이 모델을 실험할 마을을 모았다. 환경 관련 아이디어를 구체화해 사업화 단계로 나아가도록 돕는 숲과나눔의 ‘풀꽃’ 사업에 올라탔다. 6개 마을, 50개 가게가 참여했다. 10주 동안 약 340kg의 종이팩을 수거해 화장지 660롤로 교환했다. 화장지는 각 마을에서 필요한 시설에 전달했다.
“이게 되네?” 김지현씨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방법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소셜미디어로 홍보했다. 모델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종이팩은 종이가 아니다’라는 카페라떼클럽의 슬로건도 꽤나 유명해졌다. 전국 곳곳에서 카페라떼클럽 모델을 지역 상황에 맞게 각색한 활동이 이어졌다. 마을 장터나 축제에서 종이팩을 수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게 됐고, 제로웨이스트샵에 종이팩을 모으는 거점 공간이 생기기도 했다.
카페라떼클럽의 활동이 활발했던 광주 광산구에서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주민센터에 종이팩을 가져가면 포인트를 주는 제도를 시도하고, 마을 곳곳에 종이팩 무인회수기를 설치했다. 그 결과 2020년 6t이던 종이팩 수거량은 2023년 45t으로 늘었다.
숲과나눔, 흩어졌던 시민들을 조직하다
종이팩 재활용을 향한 시민들의 열정은 2023년 ‘초록열매 종이팩 컬렉티브’ 프로젝트로 연결됐다. 숲과나눔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진행하는 사업으로, 자원순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발굴하고 정책까지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숲과나눔은 국내 종이팩 자원순환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중추조직으로 나섰다. 2022년 국내 종이팩 재활용률은 13.7%에 불과하다(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 자료). 연간 종이팩 배출량은 약 7만 5000톤인데 이 중 약 1만 톤만 재활용되는 것이다. 스웨덴(80%), 대만(70%), 미국(60%), 캐나다(56%) 등과 비교해도 재활용률은 현저히 낮다.
이지현 숲과나눔 사무처장은 “숲과나눔은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단계적으로 지원하는 ‘풀씨’ ‘풀꽃’ ‘풀숲’ 사업을 진행 중인데 카페라떼클럽의 활동은 특히 성과가 좋았던 모델이었다”며 “흩어져 있던 시민들의 활동을 체계화하면 ‘근본적인 변화’까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추조직으로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종이팩 컬렉티브 프로젝트는 크게 ▲회수모델 개발 ▲정책 포럼 ▲인식개선 캠페인 등으로 나눠 추진된다. 종이팩 수거량을 늘리기 위한 회수모델 모델 실험은 학교, 아파트, 카페, 마을에서 각각 진행된다. 실험에 참여한 단체들은 수거량을 늘리기 위해 분리배출을 위한 ‘거점 시설’을 설치했다.
학교를 대상으로 실험 중인 ‘유어스텝’은 광주 초등학교 6곳에 초등학생 키를 훌쩍 넘는 종이팩 모양의 ‘종이팩 정거장’을 설치했다. 수거함은 단번에 눈길을 끌었고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종이팩 수거에 참여하고 있다. ‘도담마을사회적협동조합’은 서울 도봉구 아파트 20개 단지에 종이팩 전용 수거함을 설치하고 100개 단지에서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조은샘 도담마을 이사는 “종이팩 전용 수거함을 설치해 두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에게 종이팩은 따로 배출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며 “시설만으로도 인식의 변화가 생각보다 빨리 이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멸균팩, 건축자재가 되다
정책 포럼에는 종이팩 순환 사이클에 포함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한다. 특히 종이팩 재활용을 떨어뜨리는 주범인 ‘멸균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종이팩은 일반팩과 멸균팩 두 종류로 나뉜다. 멸균팩은 알루미늄 코팅이 더해진 팩으로 산소와 빛, 습기를 완전히 차단해 상온에서도 최소 6개월간 내용물이 변질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멸균팩이 플라스틱의 대안으로 주목받으면서 2014년 전체 종이팩 사용량의 25.3%를 차지하던 멸균팩 비중이 2022년 45%까지 늘었다. 2025년에는 멸균팩 사용량이 일반팩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포럼에서는 시도 단계에 있는 멸균팩 재활용 성과들이 공유됐다. 한솔제지는 최근 멸균팩을 이용한 백판지(박스 포장 원재료) 생산에 성공했다. 정식품은 이 백판지를 베지밀 포장 박스에 적용하기로 했다. 자연라이프는 아이쿱생협에서 생수를 담아 팔았던 멸균팩을 수거해 건축용 판넬을 개발했다. 전복경 자연라이프 대표는 “멸균팩을 이용한 건축자재는 해외에서는 이미 상용화됐다”고 말했다.
포럼에서는 재활용 종이팩 경제성을 높이기 위한 지원금이 높아져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종이팩 재활용이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돈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200ml 일반팩 한 개 가격은 2.8원. 3600개 수거해야 겨우 1만원을 넘게 번다. 배출량이 많지도 않다. 1000세대 아파트 단지에서 한 달에 배출되는 종이팩은 평균 60kg이다. 다 수거해 팔아야 1만6800원을 받을 수 있다.
한 번에 많은 양이 회수되는 게 아니라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도 어렵다. 일반 종이를 모아 1톤 트럭을 채우는 건 하루만에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종이팩은 몇 달이 걸린다. 소량의 종이팩을 옮기기 위해 트럭을 운행하는 것도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되는 일이다.
배연정 서울대 그린에코공학연구소 환경기술센터장은 “규모의 경제가 어려운 종이팩 특성상 회수, 선별, 재활용 모든 단계에서 지원금이 필요하다”면서 “폐기물로 처리하기에는 연간 배출되는 종이팩 7만 5000톤이 적은 양이 아니라서 매립, 소각 과정에서 환경에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시민이 제안하는 4가지 정책
종이팩을 회수선별하는 업체들이 자체적으로 솔루션을 만든 사례들도 포럼을 통해 공유됐다. 대흥리사이클링은 서울과 부산에서 ‘밀크웨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우유 급식을 많이 하는 어린이집에서 종이팩을 대량으로 수거한 다음, 광학선별을 거쳐 종이팩과 멸균팩을 분류한다. 이 종이팩들을 제지사에 제공해 재생 용지를 만든다. 최근엔 한솔제지와 국내 최초로 일반팩을 활용해 화장지가 아닌 고급 인쇄용지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에이치알엠(HRM)은 종이팩을 포함해 다양한 생활폐기물을 받는 ‘에코야얼스’ 애플리케이션(APP)을 개발했다. 사용자가 앱에서 회수를 신청하면 HRM과 협약을 맺은 택배사가 방문해 수거해 간다. 수거 택배비용은 HRM이 부담한다. 사용자에게는 1kg당 100원의 탄소중립포인트가 적립된다. 강경모 HRM 팀장은 “일반 소비자들이 배출하는 종이팩이 최대한 재활용 업체로 전달될 수 있도록 HRM이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에코야얼스 앱을 통해 환경단체, 제로웨이스트샵, 가정집 등 다양한 곳에서 종이팩을 보내주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환경부는 종이팩을 종이류와 함께 배출하라는 지침을 내세우고 있다. 이 지침 때문에 우리나라 종이팩 전체 배출량의 60%가 종이류와 함께 배출되고 있다. 하지만 종이팩의 경우 플라스틱 코팅을 녹이는 재활용 공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종이와 함께 재활용되지 못하고 그대로 매립되거나 소각된다. 장재연 숲과나눔 이사장은 “시민들의 노력 덕분에 올해 초 환경부가 종이팩 별도 배출 지침을 준비하는 등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면서 “이 지침이 아파트, 주택가 등에 종이팩 전용 수거함을 설치하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종이팩 컬렉티브 목표는 2026년까지 종이팩 자원순환을 가로막는 제도를 개정하고 효과적인 재활용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것이다. 오는 6월에는 지금까지 나온 의견과 성과를 종합해 시스템 확립에 필요한 정책안을 정부에 전달할 예정이다.
정책안에는 ▲종이팩을 별도 수거 품목으로 지정하는 지침 개정 추진 ▲지자체 종이팩 수거 의무 강화 ▲종이팩 재활용 인정 품목 확대 ▲재생휴지 등 공공기관 녹색제품 구매 촉진 등에 대한 내용이 담긴다.
장재연 이사장은 “정부와 산업계가 오랜 시간 외면한 종이팩 재활용 문제를 시민들이 해결하고 있다”면서 “정책이 만들어지고 실행되려면 또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겠지만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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