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2] 아침 얼굴의 씨앗을 뿌리며
나팔꽃에게
두레박을 빼앗겨
물을 빌렸네
朝顔[あさがお]に釣瓶[つるべ]とられてもらひ水[みず]
때는 1700년대 초. 지금처럼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시대가 아니다. 아침밥을 지으려면 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가야 한다. 이른 아침, 촉촉한 이슬을 밟고 새소리를 들으며 우물가로 다가간 한 사람이 두레박을 던지려는 찰나, 저런! 벌써 두레박을 차지한 생명이 있네. 안녕, 나팔꽃. 밧줄에도 푸릇푸릇한 줄기가 빙글빙글 덩굴져 있고 여기저기 보랏빛 꽃도 싱그럽다. 물을 길으려면 이 아침 귀한 생명을 죽여야 한다. 물 길으러 온 사람은 입가에 빙긋 미소라도 짓지 않았을까. 너에게 두레박을 빼앗겼으니 오늘 아침 쓸 물은 다른 데서 빌리자. 물 긷기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워 세계적으로도 널리 사랑받는 시다.
지은이는 에도 시대 여성 시인 지요조(千代女·1703~1775). 어린 시절부터 시적 감수성이 남달라 열다섯 무렵부터 바쇼의 제자들이 멀리서 만나러 찾아왔을 정도였다. 이 하이쿠는 지요조가 십 대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가장 유명한 시다. 지요조를 나팔꽃 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나팔꽃 시인 지요조는 조선과도 인연이 깊다. 1764년 영조 40년에 조선통신사 472명이 한성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와 오사카와 교토와 나고야와 하코네를 거쳐 긴 여행 끝에 에도(오늘날 도쿄)에 도착했을 때, 통신사 일행에게는 수많은 선물이 전달되었는데 그중 지요조의 시 21수를 한 수씩 적은 족자 6폭과 부채 15개가 있었다. 지요조가 한평생 쓴 시들 가운데 직접 골라 써 내려간 작품이었다. 일본의 하이쿠가 최초로 외국인의 손에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지요조는 조선에서 온 이국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를 헌상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21구를 따로 종이에 써서 직접 표구하여 집안의 가보로 전했다. 그중 한 수를 옮겨본다. ‘박꽃이어라 어디론가 숨어도 아름답구나/夕顔や物のかくれてうつくしき’
일본어로 나팔꽃은 아사가오(朝顔), 아침 얼굴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뜨거운 태양 아래 잠들기 때문에. 박꽃은 유가오(夕顔), 저녁 얼굴이다. 하얀 박꽃이 달빛 아래 빛나면 무엇으로도 숨길 수 없이 아름답기에. 박꽃은 요즘 보기 힘들지만, 나팔꽃은 지금이 씨 뿌릴 때다. 아침 얼굴 씨앗을 서너 시간 촉촉이 물에 재웠다가 볕과 바람이 잘 드는 곳에 심기로 한다. 씨앗은 작고 수수하여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 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의 보이지 않는 들판에 많이 있다고, 나는 지요조처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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