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연기 공부 … 깨지면서 성장하죠"
노동계급 출신 의사 래리 역
상류층 아내에 열등감 그려
"욕설·성적 표현 나오지만
불가피하니 이해해주길"
미국의 번역 이론가 로런스 베누티는 번역을 '불가피한 손실을 막대한 이득을 활용해 보충하는 시도'라고 표현했다. 번역을 할 때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원작의 손실이 발생하고, 번역가는 자국의 맥락에서 원작을 재창조함으로써 손실을 보완한다는 설명이다.
1997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뒤 30여 개 언어로 번역된 연극 '클로저'가 지난달 23일부터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 중이다. 한국 무대는 2016년 이후 8년 만이다. 현대의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클로저'는 소설가를 꿈꾸는 부고 전문 기자 댄과 스트리퍼 앨리스, 사진작가 안나, 의사 래리 등 네 사람이 겪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부정적 측면들을 적나라하게 부각하는 블랙코미디 작품이다.
'라스트 세션'(2023) 이후 1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 배우 이상윤은 정직하지만 욕망에 충실한 의사 래리 역을 맡았다.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래리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런던의 상류층 사진작가 안나를 만나 결혼하지만 곧 헤어지며 관객에게 씁쓸한 웃음을 안긴다. 노동계급 출신으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하고 상류층 출신인 아내의 배경을 동경하는 인물이다.
이상윤이 래리를 연기할 때 중점을 둔 것은 래리가 가진 열등감이다. 상류계급과 노동계급이 선명히 구분되는 영국과 달리 한국 사회는 계급이 없어서 영국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심리를 한국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언어의 측면에서도 영국 공연에서는 안나를 연기하는 배우가 상류층의 억양인 포시(posh) 악센트를 사용하고, 래리 역을 맡은 배우는 서민 억양을 써서 두 인물의 계급 차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만 한국 사회는 계급 간 억양의 차이가 없어서 표현에 제약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비교적 선망받는 직업인 의사가 영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난관이었다. 두 나라 간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원작의 의미를 전달하는 장애물로 작용한 것이다.
이상윤은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안나와 함께 간 상류층 모임에서 적응하지 못해 답답해하거나 안나와 양가 부모님들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 등에서 래리의 열등감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며 "포시 악센트와 서민 악센트를 한국의 존댓말과 반말로 대체해 표현하기도 했고, 원작이 그리는 래리의 심리를 의식하면서 장면마다 인물의 성격이 묻어 나오게 연기했다"고 밝혔다.
드라마 '내 딸 서영이'(2012)로 얼굴을 알린 뒤 드라마, 영화 등에서 꾸준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이상윤이 연극을 하는 것은 배우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다. 다른 장르보다 연출가, 동료 배우와의 스킨십이 강한 연극을 하면서 연기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상윤은 "연극은 특히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많이 깨지면서 배우고 같은 배역을 맡은 다른 배우를 보면서도 많은 것을 느낀다"며 "꾸준히 연극을 하면서 더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윤은 '클로저'의 관객에게 노골적인 표현 이면에 있는 작품의 의미에 주목해 줄 것을 당부했다. 연애하는 사람들의 부정적 측면을 집요하게 부각하는 작품인 만큼 성적인 표현과 욕설, 부도덕한 행동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윤은 "'클로저'가 보여주는 인물의 안 좋은 모습들은 연극적으로 과장돼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 사실 우리들 모두가 갖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며 "불편해할 수 있는 요소지만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불가피한 부분이라는 점을 고려해 관람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영국 원작과 8년 전 한국 공연보다 노골적 표현을 상당 부분 덜어냈다. 적나라한 표현이 일부 관객들에겐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2024년의 시의성을 고려한 '번역'이었다.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 배우로 '엄친아' 이미지를 가진 이상윤에게 래리처럼 스스로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을까? 이상윤은 "연기력"이라고 밝혔다. 그는 "'라스트 세션'에 같이 출연했던 이석준 배우처럼 대본을 깊이 있게 읽고 현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의사 래리 역을 연기하는 이상윤은 어린 시절 의사가 되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원래는 건축설계사 아버지를 좇아 건축과에 진학하려 했지만 IMF 경제위기 당시 어려움을 겪은 부친이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직업을 하라"고 권유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래리는 작품 내내 인터넷 채팅을 하거나 스트립 클럽에 가는 등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인물"이라며 "언젠가 의사 연기를 제대로 하는 배역을 맡고 싶다"고 말했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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