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해놓고" "회의도 거부"...총선 끝났다고 민생법안 팽개친 국회
4.10 총선 이후 한 달 넘게 지났지만 이 기간 국회는 단 한 건의 민생 법안도 처리하지 않았다. 총선이 끝났다고 민생 문제에 사실상 손을 놓은 셈이다.
원자력 발전 전면 중단 사태를 막을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 제정안(고준위방폐물법)을 비롯해 육아휴직 기간을 최대 3년까지 늘리는 것 등을 담은 '모성보호 3법'(남녀고용평등법·고용보험법·근로기준법 개정안), 대형마트 주말 의무휴업 규제를 완화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등 민생 법안들이 오는 29일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모조리 폐기될 운명에 놓였다.
22일 정치권에 따르면 4·10총선 이후 이날까지 국회가 처리한 법안은 여야 합의로 지난 2일 본회의 문턱을 넘은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이태원참사 특별법)뿐이다. 채상병 특검법은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강행 처리됐으나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 오는 28일 본회의에서 재표결을 앞두고 있다. 총선 이후 본회의를 통과한 민생 관련 법안은 0건이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국회에 계류된 법안은 총 1만6726건이다. 이 중에는 처리가 시급한 민생 법안들이 적지 않다. 해당 민생 법안들은 29일까지 처리되지 못하면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동시에 자동 폐기된다. 이렇게 되면 22대 국회에서 법률 제·개정을 위한 절차를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19대와 20대 등 앞선 국회는 총선이 끝난 직후라도 밀린 민생 법안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4년 전 20대 국회는 총선이 끝난 후 2번의 본회의를 열고 이른바 'N번방 방지법'(정보통신망법·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등 219개의 법안을 여야 합의로 처리했다.
8년 전인 19대 국회에서도 총선 이후 사망이나 중증상해 피해를 입은 의료사고 당사자와 유족이 의사 또는 병원의 동의 없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조정신청을 할 수 있게 한 이른바 '신해철법'(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법 개정안) 등 129개 법안을 처리했다. 당시에는 19대와 20대 국회 모두 '늦장 처리'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국회의 의무를 마지막까지 방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1대 국회에서는 '늦장 처리'조차도 쉽지 않아 보인다. 채상병 특검법에 따른 여야 대치로 정국이 급랭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야당의 일방적인 입법 독주에 맞서 상임위원회는 물론 본회의 보이콧 가능성도 열어둔 상태다. 물론 김진표 국회의장이 이달 28일 본회의 개의를 공언한 만큼 국민의힘 반대에도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본회의에 직회부한 '양곡관리법 개정안'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민주유공자법 제정안' 등은 가까스로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마저도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행사할 경우 법률로 공포되기 어렵다.
민주당 등 야권에서는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항의 집회를 여는 등 대여투쟁에 집중하고 있다. 여권도 국회로 돌아온 채 상병 특검법 재표결을 앞두고 표 단속에 여념이 없다. 여야 원내 지도부는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접촉하고는 있으나 민생법안 처리보다는 원 구성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이미 여야가 이견을 상당히 줄인 법안도 자동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원자력 발전소 가동으로 발생하는 핵연료의 처리시설을 마련하기 위한 고준위방폐물법이 대표적이다. 해당 법안은 '풍력발전보급촉진 특별법(풍력발전법)'과 함께 처리하는 것으로 여야가 공감대를 형성했으나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중소기업협동조합법 개정안 본회의 직회부 연계를 주장하면서 최종 합의에 난항이 이어지고 있다. 이날까지도 본회의 전 상임위 전체회의 소집 여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방폐장을 짓는 데만 30년이 넘게 걸리는 상황에서 법제화가 늦어지면 최악의 경우 원전 가동을 멈춰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현재 국내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곳이 없어 원전에서 발생한 사용후핵연료 등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들은 모두 해당 원전 부지 내에 임시로 보관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 중인 'AI(인공지능) 산업 육성 및 신뢰 기반 조성에 관한 법률안', 이른바 'AI법'도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 등 세계 주요국은 AI 제도 정비에 나서고 관련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세우는 반면 국내에서는 법제화조차 표류하고 있다. 정부·학계·산업계 등도 이런 현실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22대 국회가 시작되면 처음부터 논의해야 하고, 법안 통과시점도 더 늦어질 수밖에 없어서다.
모성보호 3법도 마찬가지다. 해당 법안들은 육아휴직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배우자 출산 휴가의 급여 지급 기간을 '최초 5일'에서 '휴가 전체 기간(10일)'으로 확대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저출산 문제가 시급하다는 공감대 아래 여야 이견이 적은 법안이지만 마지막 본회의 전 극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자동으로 폐기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 밖에도 △전력망 구축을 돕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대형마트 주말 의무휴업 규제를 완화하는 유통산업발전법 △10년 이상 된 노후 차를 신차로 바꾸면 개별소비세를 70% 한시적으로 감면해 주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시설에 투자한 비용의 25%에 대해 세액을 감면하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비과세한도 및 납입한도 상향이 담긴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등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머니투데이 the300과의 통화에서 "이미 합의된 법안도 (민주당이) 조건을 새로 걸어서 합의가 어려워진 것들도 많다"며 "법안이 논의에 오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 소속의 한 재선의원은 "여당이 대화는커녕 상임위 소집조차 거부하는 상황에서 타협안을 만들어내기 쉽지 않다"며 "상임위에서 논의하고 협의한다면 마지막 본회의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안재용 기자 poong@mt.co.kr 민동훈 기자 mdh5246@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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