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의료개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 건너나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2024. 5. 2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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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이 의료계가 보건복지부·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낸 의대 증원·배분 집행정지 신청에 대해 각하와 기각 결정을 내린 가운데 17일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지난 16일 서울고등법원이 의대 증원에 대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각하·기각했다. 재판부는 의대 2000명 증원의 집행정지가 '공공복리 측면에서의 사회적 손실이 훨씬 크다'고 밝혔다. 정부가 고집하는 '과학적 근거'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기대했던 의료계가 절망했다. 결국 병원과 강의실을 떠난 전공의와 의대생도 복귀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자칫하면 사법부의 존재 이유까지 의심하게 만들 수 있는 걱정스러운 결정이었다.

수련병원 운영과 의사 양성 체계를 뒤즉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의대 증원이 어떻게 공공복리에 이익이 된다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다. 오히려 10년 후에나 효과가 나타나는 엉터리 개혁으로는 지금 당장 국민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특수·지역 의료를 살려낼 수 없다는 '과학적 진실'을 지적했어야 마땅하다. 

가처분 신청에 대한 서울고법의 결정으로 의대 증원의 명분을 확보했다고 보고 의료 공백과 의대 교육 정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의대 교수들의 입장은 다르다. 의대생들이 대법원·서울고법에 제기해 놓은 가처분 신청을 5월 말까지 결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의 의대증원안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을 이탈한지 3개월째인 20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 전공의 모집 홍보물이 붙어있다. 연합뉴스 제공

● '과학적 근거'와 '합리적 근거'

의대 입학정원 2000명 증원은 확실한 '과학적 근거'에서 도출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는 것이 그동안 정부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정부가 대규모 증원에 반발하는 의료계를 향해 '과학적 근거'와 합리적 논리에 기반한 통일된 대안을 가져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의사단체들의 중구난방식 제안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과학적 근거'는 사실 '과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의사를 양성하는 의대의 입학정원 결정에 적용하는 '과학 법칙'도 없고, '과학적 원리'도 없다. 오히려 의대의 입학정원은 우리의 의료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합리적인 미래 전망, 그리고 의과대학과 수련병원의 교육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사회적 합의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가 국민 설득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합리적 근거'다.

정부가 강조한 '과학적 근거'가 절망적으로 부실했던 것도 사실이다. 2022년 5월 이후 의료계가 참여하는 '37차례'의 논의를 거쳤고, 고령화 등에 의해 10년 후에는 1만 명 이상의 의사가 부족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고작이다. “통계와 연구를 모두 검토하고, 현재는 물론 미래의 상황까지 꼼꼼하게 챙겼다”는 주장도 억지였다.

더욱이 정부가 법원에 제출한 자료에서는 의대의 증원 규모를 본격적으로 검토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 언론의 분석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의대 2000명 증원 제안은 지난 2월 6일에 개최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제대로 된 논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원도 의대 증원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 결국 정부가 제시한 증원에 대한 산출 근거는 미흡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2035년까지 부족한 의사 1만 명을 확충하려면 2025년부터 매년 2000명을 증원해야 헌다는 산술적 계산이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2000명이라는 구체적인 수치 자체에 직접적인 근거는 특별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의대 증원 2000명이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는 주장도 공허한 것이었다. 교육부 장관이 지역거점 국립대 총장 6명에게 전화한 것으로 의대의 입학정원이 500명 이상 줄었다. 정말 확고한 '과학적 근거'가 있었다면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는 2000명을 고집어야만 했다.

정부가 어설픈 '과학적 근거'를 내놓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작년 10월 국민연금 개혁안을 내놓을 때도 '과학적 근거'를 강조했다. 역시 과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80여 차례의 전문가 논의와 24회의 계층별 심층 인터뷰를 '과학'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개혁은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나 사회적 합의 없이 결론적인 숫자만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설득에 필요한 '합리적 근거'를 '과학'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과학'을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양치기 소년'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정부의 의대증원안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을 이탈한지 3개월째인 20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한 의료관계자가 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 미래를 핑계로 현재를 포기하겠다고?

 
보건복지부가 전공의를 대상으로 다음 주부터 '원칙'에 따라 면허 자격 정지 처분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의사를 '악마적 범죄 집단'으로 매도하고, 법적 근거도 부실한 '엄무개시명령'을 앞세워 젊은 전공의를 위협하고 있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전공의가 1년 단위 수련계약의 종료에 따라 제출한 사표를 틀어쥐고 있는 것은 억지다. 현직 검사도 사표만 제출하면 정치적 목적의 출판기념회를 열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육부가 대학에게 의대 증원을 위한 학칙 개정을 조속히 마무리해 줄 것을 촉구하는 것도 황당하다.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은 고등교육법에 명시된 '대학입시 예고제'를 정면으로 무시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의대의 여건이 좋은 서울 소재 의대를 제외해 버린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결정이었다. 대학 사회의 반발이 상당하다. 17일 기준으로 의대 정원이 늘어난 32개 대학 중 학칙 개정을 마친 대학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5개뿐이다. 내년도 입시를 코앞에 둔 대학이 아직도 입시요강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병원을 떠나버린 전공의와 수업을 포기한 의대생들이 복귀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당장 의대 교육이 무너지고 있다. 듣도 보도 못한 '학년제'가 무너지는 의대 교육을 지켜줄 것이라는 교육부의 기대는 어설픈 것이다. 의예과 학생들이 교양 과목을 이수하는 일도 쉽지 않게 돼버렸다. 늘어나는 신입생과 재이수가 필요한 재학생이 엉망으로 뒤엉킬 수밖에 없는 의대는 내년부터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북새통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의대 교육의 정상화에는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100개 수련병원도 심각한 혼란에 빠지고 있다. 전공의의 값싼 노동력으로 수지를 맞추고 있는 수련병원은 이미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들고 있다. 정부가 건강보험 예산을 선지급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수련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와 행정직원의 일자리도 위협받고 있다. 수련병원 근처의 약국과 제약회사의 고통도 심각하다. 의대가 부속병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수련병원의 재정난이 대학 전체의 재정난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지난 15년 동안의 반값 등록금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있는 사립대학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전임의(펠로우)의 70%가 복귀했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당장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받은 '전공의'(인턴·레지던트)의 수련이 중단돼 버렸다. 올해 수련을 시작하는 인턴이 130여 명뿐이다. 현재의 의료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3000명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병원을 떠나버린 전공의가 조만간 복귀하더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올해 '전문의' 시험에 응시해야 하는 레지던트 3·4년차에게 응시 기회를 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년에는 사태가 더욱 심각해진다. 전임의 충원도 불가능해지고, 군의관과 보건의 충원도 어려워진다. 의과대학의 교수진 충원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10년 후 의사 1만 명 증원을 위한 정책이 당장의 의료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어설픈 진단과 엉터리 처방으로 시작한 의료 개혁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는 형국이다. 멀쩡했던 의료 현실을 이 지경을 망쳐놓은 보건복지부가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훌쩍 넘어섰다. 코로나19 방역에 헌신했던 의료진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조차 외면하고, 국민 건강을 지켜온 의사들을 '악마적 범죄 집단'을 매도해 버린 것이 바로 보건복지부였다. 실습용 카데바와 무자격 외국인 의사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중증 환자를 전세기에 태워서 외국 병원으로 이송하겠다는 보건복지부는 바닥부터 개혁해야 한다.

결국 어설픈 의대 증원은 내년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명망있는 의사들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무너지고 있는 의료 현장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설득력이 없는 어설픈 '과학적 근거'로 밀어붙이는 섣부른 '의료 개혁'은 정부의 헌법적 권한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보건복지부의 여론조사는 믿을 것이 아니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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