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선관위, 공분의 대상이 되다

이오성 기자 2024. 5. 22.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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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선관위의 도덕성과 직업윤리가 파탄 수준이다. 지방공무원이었던 자녀가 ‘아빠 찬스’로 국가공무원이 됐다. 선관위에 대한 개혁 논의는 공전하고 있다.
2023년 5월31일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노태악 위원장이 채용 비리와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사상 최대 위기에 빠졌다. 내부 도덕성과 직업윤리가 파탄 수준에 이르렀다는 감사 결과가 나왔다. 4월30일 감사원은 2013년부터 선관위가 실시한 총 291차례 경력 채용에서 모두 1200여 건(중앙선관위 400여 건, 지역선관위 800여 건)의 규정 위반과 비리가 있었다고 밝혔다.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충격적이다. 2022년 3월까지 재임한 김세환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의 아들 김아무개씨는 선관위 내부에서 ‘세자’로 불렸다. 김씨는 강화군청에서 일하다 2020년 1월 강화군선관위로 이직했다. 당시 신규 경력 채용 인원은 이미 다 찬 상태였는데, 김씨가 지원한 뒤 합리적 사유 없이 인원이 한 명 더 늘었다.

특히 경력 채용 선발에 참여한 면접위원 세 명이 모두 김 전 사무총장과 친분이 있는 내부 직원이었다. 내부 직원만으로 면접위원을 구성한 것도 규정에 어긋난다. 면접위원 중 한 명은 김씨의 결혼식 때 축의금을 접수한 이였다. 김씨는 두 명에게 면접 점수 만점을 받아 두 명 선발에서 2순위로 채용됐다. 선관위로 옮긴 이후에도 김씨는 관사 제공 대상자(비자발적 전보자)가 아니었음에도 무료로 관사를 제공받았다.

김 전 사무총장 후임인 박찬진 전 사무총장의 딸이 2022년 전남선관위에 채용되는 과정에서도 비리 혐의가 있었다. 당시 인사 담당자는 외부 면접위원의 면접 점수란을 비워두게 했고, 자신이 박 전 총장 딸을 포함한 ‘합격 내정자’ 여섯 명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면접 점수 조작이었다. 내정자에 포함되지 못한 나머지 네 명은 불합격 처리됐다.

전 서울선관위 상임위원의 자녀가 2021년 서울선관위에 채용될 때는 내부 면접위원이 평정표를 연필로 작성해 제출하면 인사 담당자가 점수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후 선관위 자체 특별감사가 시작되자 당시 서울선관위 인사담당 과장은 관련 서류가 포함된 서류함을 “갈아 버리라”고 지시하는 등 증거를 인멸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8년 송봉섭 전 중앙선관위 사무차장은 자신의 딸을 충북선관위에 채용하기 위해 직접 관할 선관위에 전화해 압력을 행사했다. 청탁 전화 일주일 만에 송 전 사무차장의 딸 한 명만을 위한 ‘비공개 채용’이 치러졌고, 내부 직원만으로 구성된 채용 담당자들은 모두 만점을 주어 합격시켰다.

감사원이 4월30일 발표한 자료에는 이런 사례가 13쪽에 걸쳐 망라돼 있다. 채용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선출직’인 군수에게 직접 압력을 행사하거나, 채용 규정을 멋대로 위반하거나 무시한 정황이 수두룩하다. 자녀는 물론 사위까지 특혜 채용 대상이 되었다.

복무 문제도 심각했다. 한 지역선관위 사무국장은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 한 건을 반복 사용해 여러 차례 병가를 냈다. 자기가 낸 병가를 스스로 결재하는 ‘셀프 병가’로 8년간 100일 넘게 병가를 내거나 무단결근했다. 그는 무단결근하는 동안 해외여행 등을 다닌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지역 선관위 직원은 재직 중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다니다가 적발됐다. 로스쿨 재학은 휴직 사유가 될 수 없음에도 지역 선관위 사무처장은 이 직원의 휴직을 승인해줬다. 이 직원은 복직한 뒤에도 근무시간에 무단으로 로스쿨에 다녔다.

‘고위직 나눠먹기’ 혐의도 포착됐다. 선관위는 4·5급 공무원이 일할 자리에 3급을 배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3급 이상 고위직을 정원의 40% 넘게 더 두었다. 임기가 6년인 시·도선관위 상임위원(1급) 자리는 2~3년 단위로 끊어서 여럿이 맡게 했다. 연금을 많이 받는 고위직 퇴직자를 대거 배출한 셈이다.

공정한 선거를 위해 헌법상 독립기관 지위가 부여된 선관위에서 각종 비리가 터져나오면서 선관위 전체가 범죄 조직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감사원 내부에서는 “중앙에서 지방까지, 한 기관 전체가 비리로 얼룩진 사건은 처음 본다”라는 개탄이 나왔다.

5월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들이 ‘공공부문 채용 비리 근절’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선관위 비리 의혹은 1년 전 불거졌다. 지난해 5월 박찬진 당시 중앙선관위 사무총장과 송봉섭 사무차장의 자녀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선관위의 경력 채용에 합격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선관위가 자체 조사를 시작하자 두 사람은 사퇴했다. 이후 감사원이 감사에 착수하겠다고 나서자 선관위가 거부하면서 사회적 논란이 커졌다. 헌법상 독립기관인 선관위는 감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게 선관위의 주장이었다. 그러는 사이 지난해 9월 국민권익위원회가 선관위를 조사한 결과 지난 7년 동안 경력직 채용 비리 353건이 적발됐다.

선관위 채용 비리 사건의 공통점은 지방공무원 신분이던 자녀 등을 경력직으로 데려오려 했다는 점이다. 선관위 경력 채용이 지방공무원을 국가공무원으로 ‘신분 상승’시키는 통로였던 셈이다. 가장 바쁜 시기인 선거철을 앞두고 지역 선관위마다 휴직자가 속출해 경력직 충원 공고가 잦은 편이기도 했다. 이 빈틈을 ‘아빠 찬스’가 차지했다.

정치권의 반응은 엇갈린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채용 비리 의혹이 불거진 이래 선관위를 항의 방문하는 등 비판 수위를 계속 높여갔다. 최근 감사원 발표 이후에는 “선관위 해체 수준의 강력한 대책이 시급하다”라고 밝혔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감사원 발표 이후에도 관련 논평이 나오지 않고 있다. 여권이 채용 비리 이슈를 정략적으로 가져가려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채용 비리는 엄중하게 보고 있지만, 선관위의 중립성을 흔드는 방향으로 사회적 논의가 진행돼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선관위는 정치권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나서서 칼을 뽑자니 선거 때 불이익을 당할까 봐 쉬쉬해온 측면도 있다. 자칫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개혁 방안조차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선관위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라는 명제를 입증하고 말았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내부에 뒀던 감사기구를 외부에 설치하고, 인원 채용 시 100% 외부위원에게 전형을 맡기는 등 자정 기능을 계속 강화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감사원은 선관위 전현직 직원 27명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대검찰청에 수사 요청했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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