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중국·러시아 눈치 보는 ‘글로벌 중추 국가’
자유민주 진영과 계속 엇박자… 중·러 환심 사도 결국엔 毒 될 것
이틀 전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총통 취임식에 한국 정부는 경축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폼페이오, 아미티지 등 전직 장·차관으로 사절단을 꾸린 미국을 비롯해 호주, 캐나다, 일본, 유럽연합 등 서방 전체가 고위급 대표단을 타이베이에 보냈다. 총 51국이었다. 대만 전체 수교국(12국)의 4배가 넘는다. 이들은 별도의 축하 메시지도 냈다. 서울에선 아무 메시지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윤석열 정부는 외국 정상 취임식에 어김없이 경축 특사단을 파견했다. 출범 첫해 필리핀을 시작으로 콜롬비아, 케냐, 브라질, 나이지리아, 파라과이에 이어 지난 1월엔 과테말라에 사절단을 보냈다. 권성동, 정진석, 원희룡 같은 유력 정치인들이 단장을 맡았다. 지구 반대편의 경조사까지 살뜰히 챙겨 온 정부가 가장 가까이 있는 6위 교역국의 경사는 외면했다. 외교부는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해온대로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뜻이다. 대만은 윤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받지 못했다.
대만은 1949년 1월 신생 독립국이던 대한민국을 가장 먼저 국가로 승인하고 수교했다. 북한이 남침한 건 이듬해 6월이다. 유엔 안보리는 즉각 유엔군 한국 파병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대만), 소련이었다. 소련이 표결에 불참한 것도 천운이지만 대만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거 인연은 차치하고서라도 대만은 한국과 자유민주주의, 인권,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다. 외교 용어로 ‘유사 입장국’(like-minded group)이다. 이런 나라들이 50개쯤 된다. 익숙한 말로 ‘자유민주 진영’이다. 이들이 대만 총통 취임식에 대표단을 보냈다. 한국만 이 대열에서 이탈했다. 대만은 섭섭하고 유사 입장국들은 의아했을 것이다. 작년과 재작년 유엔 총회 제3위원회에서 신장·위구르 인권 침해를 규탄하는 성명이 나왔을 때가 연상된다. 그때도 동참한 나라가 50~51개였고 한국만 발을 뺐다. 모두 이번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반복되고 있다. 2주 전 모스크바에선 푸틴 대통령의 5번째 취임식이 열렸다. 크렘린궁은 각국 대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자유 민주 진영, 즉 유사 입장국 대부분은 취임식을 보이콧했다. 이웃국가를 침략하고 정적을 제거한 독재자가 영구 집권을 자축하는 자리라고 봤다.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연대의 의미도 담았다. 한국 정부 생각은 달랐다. 이도훈 주러시아 대사를 참석시켰다. 프랑스 대사도 함께라 민망함은 좀 덜했을지 모르겠다.
임기 초반의 단선적 외교를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일 수 있다. 그런 것이면 다행이겠다. 대만 총통 취임식 1주일 전 베이징에서 한중 외교장관 회담이 열렸다. 중국은 “대만 문제를 신중히 처리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중국을 설득해 이달 안에 한중일 정상회의를 성사시켜야 하는 정부로선 흘려듣기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전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선교사를 간첩 혐의로 구금했다. 중국을 겁내는 공중증(恐中症)과 ‘러시아 포비아’는 한국 외교의 고질병이다.
권위주의 정권을 상대할 때 중요한 건 유사 입장국의 단합된 언행이다. 한국은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이자 ‘글로벌 중추국가’를 자처하는 나라다. 안보리를 능멸한 푸틴 대관식에서 손뼉치고 대만 총통 취임식을 모른 척 해선 곤란하다. 당장 중국·러시아의 환심을 살 순 있겠지만 결국엔 우리 외교에 독(毒)이 될 것이다. 9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톈안먼 망루에 올라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지켜봤다. 자유민주 진영 전체가 보이콧한 행사였다. 중국의 화답은 무자비한 사드 보복이었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도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면 ‘외교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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