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베트남 승전과 역사의 교훈

정지섭 기자 2024. 5. 2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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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베트남 디엔비엔푸 시에서 열린 1954년 디엔비엔푸가 프랑스 식민군을 상대로 승리한 70주년 공식 축하행사 모습./AFP 연합뉴스

베트남 서북부 도시 디엔비엔푸에 이달 초 국제사회의 시선이 쏠렸다. 70년 전 바로 이날 국부로 추앙받는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군이 이곳에서 50여 일 전투 끝에 프랑스군을 물리친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것이다.

헬기가 축하 비행을 했고, 시민과 군인들이 승전 퍼레이드를 벌였다. 패전국 프랑스 국방장관·보훈장관도 기념식에 처음 참석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아시아 피식민지가 유럽 식민 통치 세력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첫 사례다. 승전 70주년은 지났지만, 경축 분위기는 해를 넘어서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미국을 축출하고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병합한 통일 50주년이 내년 4월이기 때문이다.

미국 요청으로 파병했던 한국은 1992년 베트남과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수교한 뒤 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 급속히 밀착하고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베트남 통일 역사를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통일에 이르는 20여 년 궤적은 분단 상태인 대한민국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프랑스를 격퇴하며 사기가 오른 베트남 공산 세력은 1955년 미국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이 수립되자 적화통일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1960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속칭 베트콩)’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미국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에 비해 무기·병력에서 절대 열세였지만 공산 세력에는 선전·선동이라는 수단이 있었다.

남베트남이 권력층 부정부패와 쿠데타 등 잇단 정치 혼란으로 어수선한 틈을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반미 감정을 고취시키고, 반전 여론 조성으로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결정타는 1968년 1월 ‘뗏(음력설) 대공세’였다. 남베트남 전역 31곳에서 군경과 미군을 습격한 공산 세력은 남베트남군(1만4000명), 미군(2000명)보다 더 많은 5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미국 사회에 반전 여론을 들끓게 해 미군이 철수하는 중대 계기가 됐다. 1975년 4월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며 적화통일이 완료됐다.

베트남 통일 과정이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은 두 가지다. 분단 국가에서 내분은 패망의 지름길이고 힘이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대우받는 건 ‘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힘이 지속될지 불안케하는 상황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정치권은 분열하고, 민심은 싸늘해졌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의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고, 핵·미사일로 위협하던 북한은 대법원까지 해킹했다.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되면 주한 미군 철군·감축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잇따른다. 풍년일 때 흉년을 대비하는 건 경세의 기본. 우리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베트남인 만큼 국가의 경사는 축하해야겠지만, 그 이면에서 교훈을 찾는 일도 병행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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