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특허청은 그를 에디슨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2024. 5. 2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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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⑪ 모스펫 발명한 강대원 [끝]

인류가 가장 많이 만들어낸 인공 구조물은 모스펫(MOSFET·금속-산화층-반도체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이라는 반도체다. 통계에 따르면 2018년까지 1.3X10²²개의 모스펫이 만들어졌다. 스마트폰에서부터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명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바로 모스펫인데, 이를 발명한 사람은 한국인 물리학자 강대원이다. 모스펫으로 조그만 칩 하나에 수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며 비로소 IT 산업이 꽃피기 시작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반도체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46년 탄생한 세계 최초의 전자식 범용 컴퓨터 에니악(ENIAC)은 진공관을 사용했다. 1만8000개의 진공관이 장착된 이 장치는 집채만 한 크기에 무게는 30톤이 넘었다. 소비 전력도 엄청나 인근 도시 전기 공급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이를 해결하며 등장한 반도체가 트랜지스터다. 1947년 등장한 트랜지스터는 컴퓨터 크기를 300분의 1, 소비 전력은 1500분의 1로 줄였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미국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 존 바딘, 월터 하우저 브래튼 세 사람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결정적 기술이 등장한다. 1958년 미국의 잭 킬비는 여러 전자 부품을 한 칩에 넣을 수 있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IC)를 개발한다. 잭 킬비 역시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캠퍼스에서 어린 딸과 나란히 손을 잡고 서 있는 강대원 박사. 195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강대원은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4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벨 연구소에 들어간 그는 입사 1년 만인 1960년 반도체 소자의 집적도를 높여 작은 면적에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는 모스펫 원리를 구현하는 발표를 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 공훈록

이 무렵 미국 유학 중이던 강대원은 새롭게 떠오르는 반도체를 주목했다.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중, 경기고를 월반해 가며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대입 검정시험에 합격했을 때 불과 17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진주중, 진주고 교장을 거쳐 보성고 교장, 부산사범대학 초대 총장을 지낸 강정용이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강정용의 동기로는 역사를 전공한 함석헌이 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에서 복무한 강대원은 1955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4년 만에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그의 선택은 당시 반도체 혁신을 이끌던 벨 연구소였다. 1959년 입사한 강대원은 1년 만인 1960년 세계를 뒤흔든 발표를 한다. 모스펫이었다.

모스펫은 반도체 소자의 집적도를 높여 더 작은 면적에 훨씬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는 기술이다. 게다가 소비 전력도 훨씬 줄일 수 있다. 오래전부터 모스펫 원리는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구현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반도체 회로의 소형화, 집적화가 요구되면서 모스펫 개발이 절실했다. 바로 이때 신입 연구원 강대원이 최초로 동작하는 모스펫을 세상에 보인 것이다. 오늘날 최신 반도체에는 500억개가 넘는 트랜지스터가 들어가니, 무려 500억개의 진공관을 작은 칩 하나에 넣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강대원의 모스펫이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강대원은 한발 더 나아갔다. 벨 연구소에서 팀장이 되어 후속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 또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결과를 발표한다. 전원을 꺼도 저장된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플로팅 게이트 기술을 개발한다. 현재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USB와 대형 저장 장치에 쓰이는 낸드 플래시 메모리는 강대원 박사의 플로팅 게이트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기술 역시 세상을 바꾸었다. 지워지지 않는 메모리는 나중에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열어 100년이 넘는 전통 필름 카메라 업체들을 사라지게 했다. MP3 플레이어의 등장은 오디오 시장을 바꾸어 카세트테이프와 CD를 대체했다.

이제 세계 전자 업계에서 강대원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1975년 강대원은 미국 프랭클린 연구소의 스튜어트 밸런틴 메달을 받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을 기념하는 이 연구소는 메달 수상자를 엄격히 선정한다. 이 메달을 받은 인물들만 보아도 강대원의 업적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수상자에는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그리고 반도체 개척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 잭 킬비 등이 있다. 세계적 과학자만 받는 이 메달 수상자 중 105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1988년 강대원이 벨 연구소를 은퇴하자, 일본 최대 IT 회사 NEC가 글로벌 연구 센터를 미국에 설치하며 그를 초빙했다. 이곳에서도 계속 새로운 연구를 시도하던 강대원은 1992년 학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대동맥류 파열로 급사한다. 향년 61세였다. 많은 이가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트랜지스터와 반도체 집적회로로 노벨상을 받았으니 다음 순서가 모스펫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잭 킬비는 IC로 노벨상을 받으며 오늘날 반도체 산업이 이렇게나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것은 강대원의 모스펫 덕분이라고 했다.

2009년 미국 특허청은 IC 개발 50주년을 기념해 ‘무어의 법칙’ 창시자이자 인텔 창업자인 고든 무어, 공동 창업자인 앤드루 그로브와 함께 강대원을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앞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인물로는 에디슨, 벨, 라이트 형제, 노벨 등이 있는데, 강대원 박사가 이들과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2014년 서울대학교 반도체공동연구소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고, 2017년 한국반도체학술대회는 ‘강대원상’을 제정했다. 그는 오늘날 세계 반도체 산업을 가능하게 만든 선구자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시작

강대원 박사가 모스펫과 플로팅 게이트를 발명하던 무렵, 우리나라 현실은 첨단 산업과 거리가 멀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색하던 강대원 박사는 한국을 방문하곤 했지만, 국내 반도체 기반은 허약했다. 반면 일본에서 강 박사는 반도체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학자 에사키 레오나 박사와 동급 대접을 받았다. 그만큼 당시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컸다. 하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결국 한국에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다. 그중에는 강대원 박사의 3년 후배인 강기동 박사가 있다.

1959년 강기동 박사 결혼식. 왼쪽이 강기동 박사 부부, 오른쪽이 강대원 박사 부부. 강대원 박사 부부는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장만해 주고, 피로연 식사도 준비해 주었다. 강대원의 경기고, 서울대 후배인 강기동은 1974년 경기 부천에‘한국반도체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 반도체의 선구자로 불린다. /강기동 박사 자서전

1958년 강대원이 박사과정으로 있던 오하이오 주립대에 경기고, 서울대 후배 강기동이 도착했다. 이휘소와 경기고 동기였던 강기동은 강대원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산업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1962년 박사 학위를 받은 강기동은 이미 벨 랩에서 명성을 떨치던 선배 강대원과 진로를 상담했다. 강기동 박사가 결혼할 때 강대원 박사의 아내가 신부 들러리로 나설 정도로 가까운 사이. 반도체 공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강기동은 생산 현장을 배울 수 있는 모토롤라에 입사한다.

1974년 강기동 박사는 모험을 감행한다. 강대원은 시기상조라고 우려했지만, 강기동은 직접 한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다. 반도체 생산 기술을 한국에 이식하기 위해 강기동은 최신 3인치 웨이퍼로 반도체 칩을 양산하는 공장을 세운 것이다. 이렇게 자본금을 무려 100만달러 들여 부천에 세운 회사가 ‘한국반도체주식회사’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반도체 사업은 쉽지 않았다. 결국 삼성이 1977년 이 공장을 인수한다. 1983년 미국, 일본에 이어 한국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을 만든 것이 바로 이 부천 공장이다. 한국의 반도체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과 민태기 박사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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