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시민들과 ‘공동작업’으로 전태일기념관 만듭니다
[짬] 대구 전태일기념관 짓는 송필경 조기현 김석균 장태수씨
“오늘 아침에 근처 명덕초 2학년 학생이 등교하면서 ‘아저씨, 거기 뭐 하는 곳이에요’라고 묻더군요. ‘전태일 아나?’ 했더니 모른다고 해요. 그래서 ‘나중에 이야기해줄 테니 놀러오라’고 했죠.”
오는 11월 완공 예정인 대구 중구 남산동 전태일기념관 건축 현장을 총괄하는 조기현 다울협동조합 이사장의 말이다. 그는 지난 3월 출간한 시집 ‘겨울나무로 우는 바람의 소리’(삶창시선)를 비롯해 모두 시집 3권을 필명 조선남으로 낸 시인이기도 하다. 1989년에는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30년 가까이 노동운동을 하다 두 차례 옥고도 치른 그는 2014년 고향 대구에 협동조합을 설립해 노숙인 재활을 위한 목공 수업과 주거 취약계층 집 수리 사업에 힘을 쏟아왔다. 2015년과 2016년에는 대구에서 전태일시민문화제를 앞장서 열었고 5년 전 고향의 노동·시민운동 활동가들이 전태일 기념관 건립 추진을 위해 만든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이사장 송필경) 이사도 맡고 있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2020년 열사 50주기에 맞춰 시민 3천여 명이 내놓은 기금 5억원으로 열사가 1963년 옛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 내 소재)를 다니던 시절 살던 옛집을 매입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기념관 건축을 위한 2차 모금에 나서 현재 시민 800여 명이 참여해 목표액 3억 중 2억원 이상을 모았단다. 기공식은 지난 4월17일 열렸다.
대구에서 난 전태일(1948~70)은 두 살 때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가 12년 뒤 대구로 되돌아왔다. 그 시절 세들어 1년6개월 정도 산 곳이 남산동 집이다. 열사는 학교생활과 배움의 즐거움에 빠졌던 이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했다. 열사의 여섯 식구는 판잣집 두 평 너비 방 하나에 미싱 두대까지 놓고 살았단다.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월의 흔적을 남기려고 해요. 폐허가 주는 영감이 큽니다. 이 집이 자리한 골목이나 다른 집들도 열사가 살던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열사가 살던 판잣집 터는 테두리에 기초석만 놔두려고 해요. 옛집 매입 전에 이미 판잣집은 철거되어 사라진 탓에 유족 증언과 건축 대장 등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고 2년 전에 제가 호미로 기초석을 발굴해두었죠.”
지난 17일 오후 건축 현장에서 만난 조 이사에게 기념관이 어떤 모습일지 묻자 나온 말이다. “저는 이 집을 지으면서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이 모여 이야기를 쌓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그렇게 하면서 전태일 정신이 기억되고 실행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시민과 함께하는 집짓기를 시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돌무더기를 치우는 일 같이 잡부가 많이 필요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일부러 일거리를 남겨놓고 에스엔에스를 통해 한손 보태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 함께 일합니다. 지난 일요일 공동작업의 날에는 음악가, 시인, 사진작가 등 일곱 분이 오셨죠.”
‘전태일의 친구들’ 시민 모금해 4년 전 사들인 남산동 전태일옛집
4월17일에 기념관 건축 첫삽 떠
전태일문학상 수상자가 현장총괄
전북 출신 흙건축 전문가도 참여
전 정의당 시당위원장은 현장일꾼
“기념관 건축도 시민 모금으로”
오는 31일 오후 후원의 날 행사
“1988년 총파업으로 구속된 옥중에서 전태일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는 그는 전태일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은 게 자신의 삶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했다. “상을 받고 딴 길을 가지 않고 노동운동을 계속했으니까요.”
전북 사람인 김석균 ‘흙건축연구소 살림’ 소장이 건축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기념관 건립으로 마음과 마음이 모인 한 예일 것 같다. 그는 얼마 전 작고한 통일운동가 한기명 선생 유족의 배려로 고인의 대구 집에서 머물며 현장을 오가고 있단다.
전북 순창에서 마을 건축학교를 운영하며 주거 취약세대의 낡은 집을 따뜻하고 건강한 집으로 탈바꿈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 김 소장은 조 이사와 2년 전 경주 용담정에서 남원 은적암까지 500㎞ 동학순례를 하면서 기념관을 함께 짓기로 뜻을 모았단다. “목수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된 석균 형에게 제가 ‘세상은 왜 이렇게 불평등한지 수운 최제우 선생에게 물어봅시다’며 먼저 기행을 제안했죠.”(조기현) 조 이사는 노동운동으로 구속된 뒤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막히게 된 1990년대에 먹고살기 위해 목수일을 배웠단다.
흙건축 전문가인 김 소장은 기둥뿌리가 썩어 쓰러지기 직전인 전태일 옛집의 주인집을 바로 세우거나 축대를 쌓는 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번에 대구를 다시 봤어요. 그동안은 보수의 심장으로만 알았는데 시민 3천여명이 5억원을 내 전태일 옛집을 매입했다니 ‘어! 대구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최근 만난 한 대구 상인도 진작 노동운동 단체들이 나서 전태일 옛집을 살렸어야 했다면서 안타까워하셨죠.”
현장 일꾼 중에는 정의당 대구시당 위원장과 대구 서구 기초위원 3선을 지낸 장태수씨도 있다.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 밥벌이도 할 겸 기분 좋게 잡부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념관이 정형화되고 박제화된 열사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관람객 각자가 자기만의 전태일을 상상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조 이사는 기념관이 어떤 공간이 되면 좋겠느냐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동네 아이들이 들러 시간을 보내고 청소년 인권 교육도 하고 저처럼 나이 든 노동자들이 모여 지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만남의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송필경 이사장은 앞으로 기념관이 전국적인 성지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전태일은 70년대 이후 한국 민주노동운동의 뿌리이면서 한국 민주화운동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어요. 전태일의 도덕적 가치를 알려 대구를 전태일의 도시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럴 때 대구의 수구적 의식도 깨어날 겁니다.”
그는 전태일에게 남산동 옛집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짚었다. “전태일의 의식이 형성된 매우 소중한 곳이죠. 전태일은 여기 살면서 그토록 열망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그 전에는 거리에서 구두닦이와 껌팔이를 했죠. 청옥 시절 사귄 학교 친구들과의 우애와 첫사랑 그리고 교사들로부터 받은 존중의 힘이 전태일의 인간 존엄 사상을 강하게 형성했다고 봅니다. 전태일은 이 시절에 공부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거리의 친구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하고, 살아있음을 조물주에게 감사한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죠.”
전태일의 친구들은 오는 31일 오후 대구시 중구 몬스터크래프트비어에서 ‘전태일 옛집 살리기 후원의 날’ 행사를 한다.(후원 계좌 대구은행 504-10-351220-9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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