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읽기] 공직자의 정치 중립은 '정치 외면'이 아니다
(서울=뉴스1) = 정치인의 정치적 중립은 가능할까? 5월 16일에 열린 더불어민주당 당선자 총회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된 우원식 의원은 당선 소감에서 "여야 협의를 중시하지만 중립은 몰가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 의원의 언급은 이번 국회의장 후보자 선출과정에서 유독 눈길을 끌었던 국회의장의 정치적 중립 논란에 대한 답변일 것이다. 국회의장은 취임하게 되면 당적을 포기하도록 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장은 총선에서 소속 정당의 이름을 걸고 당선된 당파적인 선호를 가진 국회의원이며, 정치 경험이 많은 노련한 정치인이다. 정치인인 국회의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주장은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정치적 중립 의무는 흔히 공무원이나 공공부문 종사자, 교육자들에게 적용되며, 공직자들은 정치, 특히 선거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공무원 조직을 동원한 관권 선거의 경험 탓에 정치적 중립을 벗어나는 행위는 법적으로 처벌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나쁜 행위로 인식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이 의외로 간단하지가 않다. 공무원들이 직무상의 권한이나 자원을 활용하여 특정한 정당의 편을 들어서는 안되며,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특정한 정당이나 정파를 두둔하는 내용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공무원은 누구이고 교육 내용의 차원에서 지켜야 할 정치적 중립이란 무엇일까?
과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법적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하고 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하였다. 이 건으로 결국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지만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하였다. 지난 총선 기간 열렸던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민생토론회에 대해서도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당적이 있고 정당 소속 후보로 나서서 당선된 대통령은 당파적인 정치인임이 분명하다. 정부의 정책은 결국 선거에서 승리하여 주권을 위임받은 이들이 소속 정당의 정책선호를 반영하여 수립한 것인데 일상적인 국정 수행과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활동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게다가 대통령이 선거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은 정치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학생인권조례 폐지 여부를 두고 여당과 야당이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 그렇다면 학교 현장의 당사자인 선생님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의견을 밝혀서는 안되는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 시절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두고 여당과 야당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당시 교육부는 국정화에 반대했던 교사들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봤다.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 어떤 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면 안되는 것일까?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음으로 양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하고 정치적인 사안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처신할 것을 장려한다. 하지만 정치는 우리 삶의 다양한 의제들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의식적으로 정치로부터 멀어지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정치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사안을 외면하는 소극적인 대응은 결과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과 주요 정당들이 제시하는 정책들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은 몹시 빈약하다. 정식 교과과정에서 당대의 정치에 대해 다루지 않는 것은 특정 정당에 치우친 소개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뿐이다. 선거연령이 하향 조정되면서 이제 고등학생들도 투표에 참여한다. 투표장에 갈 학생들이 가짜뉴스를 비롯한 편향된 정보들이 난무하는 온라인 공간에서 공교육이 외면하는 정치에 대해 배우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정치적 중립은 그 자체로 나쁜 개념이 아니지만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정치를 외면한다면 좋은 정치를 만들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정치적 중립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적 중립은 정치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치에 더욱 다가가면서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차별받지 않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권이 교체되면 이전 정부에서 승승장구했던 공무원들은 한직으로 밀려나고 대규모 인사이동이 잇따른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공무원들이 자신이 처한 조건과 정책 성향에 따라서 특정 정당, 특정 정치인과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은 언론에 일상적으로 보도된다. 동시에 여전히 우리는 공무원들에게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무원들이 당파성보다 전문성을 앞세우기를 원한다면 정권이 바뀌면 능력 있는 관료들을 한직으로 배치하는 관행에서 탈피해서 다양한 성향의 공직자들이 공존하며 경쟁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정치에 관한 교육을 회피하기보다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의 다양한 정책과 의견들을 차별하지 말고 소개해야 한다. 학생 사회에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며 경쟁할 때 우리의 학생들이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가 국회의장에게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는 것도 경험 많은 정치 원로로서 여당과 야당이 공존하며 토론하고 경쟁하도록 권장해 달라는 것이다.
/박현석 국회미래연구원 거버넌스그룹장
※미래읽기 칼럼의 내용은 국회미래연구원 원고로 작성됐으며 뉴스1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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