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신경·근육병증’, 수의사가 보는 4개 시나리오

한겨레 2024. 5. 2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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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권혁호 수의사의 반려랩
지난 3월 말부터 전국에서 고양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신경·근육병증으로 아프거나 목숨을 잃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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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하는 작은 가족 반려동물, 어떻게 하면 잘 보살필 수 있을까요.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국내 여러 동물병원에서 멍냥이를 만나온 권혁호 수의사에게 반려동물의 건강, 생활, 영양에 대해 묻습니다. 매주 화요일 오후 2시 권혁호 수의사의 반려랩과 댕기자의 애피랩이 번갈아 연재됩니다. 궁금한 점은 언제든 animalpeople@hani.co.kr로 보내주세요!

Q. 3월 말부터 전국에서 고양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신경·근육병증으로 아프거나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정부는 원인으로 지목됐던 사료 50여 건을 검사했지만, 독성이나 유해물질은 없었다고 지난 12일 발표했는데요, 도대체 고양이들을 아프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료 이외에 어떤 요인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원인 불명의 급성 신경·근육병증으로 고양이들이 갑자기 목숨을 잃는 사태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물보호단체 집계를 보면, 급성 신경·근육병증 피해 고양이는 20일 기준 532마리로 이 가운데 198마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피해 고양이들은 구토, 고열, 기립 저하, 기립 불능, 근색소뇨(근육 세포 파괴로 붉은 소변을 보는 것) 등의 증상을 보이다가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가족 같은 반려동물의 피해에 보호자들의 마음은 타들어가지만 안타깝게도 명확한 문제 원인이나 해결법은 지금까지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가 그동안 문제로 지적되어 온 국내 제조업체의 사료들에 대해 유해물질, 바이러스, 기생충, 세균 검사 등을 진행했지만 모두 음성 혹은 불검출로 판명이 났고, 숨진 고양이들의 사체 부검에서도 직접적인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정부의 조사에서 원인 물질이 특정되지 않았고, 여전히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가이드라인도 없으니 보호자로서는 답답한 상황입니다.

동물보호단체 ‘라이프’와 ‘묘연’의 집계를 보면, 5월20일 기준 고양이 급성 신경·근육병증 피해 고양이는 532마리다. 이 가운데 198마리는 사망했다. 라이프 제공

정부가 지속적으로 조사 범위를 확장하고, 구체적인 역학 조사를 벌여 또 다른 가능성을 살펴봐야 할 순서일 텐데요. 그렇다면 사료 제조의 문제 이외에 원인이 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번 글 한 편에 모든 것을 적을 수는 없지만, 추측할 수 있는 몇 가지 시나리오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먼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기존에 발견되지 않았던 전염성 질병이 원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 50여 년간 유럽에서는 집고양이들이 ‘비틀거림 병’(Staggering Disease)이라는 신경병증을 앓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병의 주요 증상을 보면, 고양이들의 중추신경에 염증이 일어나 근육이 긴장되고, 뒷발을 움직이지 못하며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지각이 매우 예민해져서 발작이 일어나기도 하며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국내 신경·근육병증과 증상만 놓고 보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최근 들어 이 병의 원인을 밝히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는데요, 사람에게 풍진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와 사촌 격인 ‘러스텔라 바이러스’(Rustrela Virus)가 원인일 수 있다는 연구가 지난해 2월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원인은 식품의 가공·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방사선이 고양이에게 신경병증을 일으키는 경우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의 식재료도 가공 및 원활한 유통을 위해서는 원재료를 변하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식물의 발아 억제, 식중독균을 포함한 병원균의 살균, 기생충이나 해충 사멸을 위해 이온화 에너지(방사선)를 이용하는데, 이러한 식품을 ‘방사선 조사식품’이라고 합니다. 적정량의 방사선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일정 수준을 뛰어넘는 방사선 처리 재료는 고양이들에게 중추신경계 질환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지난4월 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키우던 고양이 12마리가 동시에 신경·근육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보호자의 사연이 올라왔다. 이를 시작으로 보호자들은 신경·근육병증에 대한 데이터를 모으기 시작했다. SNS 갈무리

③ 사료에 특정 영양소가 많거나 적어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급성 신경·근육병증이 나타난 이번 사례와는 발생 양상이 다르지만, 비타민E가 결핍되었거나 비타민A가 과도하게 들어간 사료를 섭취한 고양이의 경우 신경증상을 앓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타민B군 가운데 하나인 비타민B1(티아민)이 결핍된 경우에도 고양이들은 어지럼증을 느끼고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전정 질환, 머리 떨림, 사지 마비를 일으키며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미국사료협회(AAFCO) 가이드라인은 ‘반려동물 일일 영양소 섭취량’ 혹은 ‘반려동물 영양소 사료 함유량’ 등을 권장하고 있는데요, 아미노산 2종(메치오닌, 트립토판)과 비타민A, 비타민D와 같은 영양소들이 최고 상한선을 넘기면 고양이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적정량의 영양소가 포함되었다고 할지라도 사료를 만들 때, 분말인 ④ 원재료들이 배합기 내에서 잘 섞이는지도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물론 사료 업체는 최대한 정확하게 제조하려고 노력하지만, 배합기 내에서도 원재료나 영양소가 충분히 섞이지 않으면 특정 부분에 영양소가 뭉치게 되고 이로 인해 영양 구성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 우리가 비빔밥을 먹을 때, 밥과 재료를 제대로 비비지 않으면 한 쪽에 고추장 덩어리가 뭉쳐서 매운 비빔밥을 먹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여러 원인에 대해 살펴봤지만 현재까지 유력하게 여겨지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사료입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사료관리법’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아직까지 반려동물을 포함한 동물이 먹는 사료를 관리하는 사료관리법은 사람의 식품보다 정교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죠. 산업동물과 반려동물의 사료 관리 기준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사료 관리에 대한 기준이 깐깐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때 강하게 처벌하는 미국에서도 펫푸드로 인한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단백질 함량을 높이기 위해 사료에 중국산 밀 글루텐을 포함하면서 고양이들이 신부전을 앓았던 ‘2007년 멜라민 파동’과 지난해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사료 회사가 비타민D와 비타민A 과잉으로 사료를 리콜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유럽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3월 말부터 전국에서 고양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신경·근육병증으로 아프거나 목숨을 잃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결국 엄격한 규제를 세우거나 이를 어겼을 때 벌을 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료를 제조, 유통, 판매하는 과정에서 동물을 우선으로 하는 윤리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반려인들 또한 동물의 먹거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가지 사료를 10~15년 동안 바꾸지 않고 관성대로 급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동물도 먹는 즐거움과 영양적인 다양성이 필요하지는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고양이 급성 신경·근육병증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먹거리뿐 아니라 고양이들에게 이러한 증상을 가져올 수 있는 다양한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 신속하게 원인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불의의 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넌 고양이들과 식구를 떠나보낸 집사분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인용 논문
Nature Communications, DOI:s41467-023-36204-w
PLoS One, DOI: 10.1371/journal.pone.0228109
Vet Record, 10.1136/vr.111.10.195

권혁호 수의사 hyeokhoeq@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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