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관계 변곡점 맞나…참았던 與, '정책 군기잡기' 시동
만 5세 입학·주 69시간·의대증원수 논란 겪고도…총선 전후 혼선 반복에 '부글'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류미나 최평천 기자 = 수직적이라는 지적이 있었던 당정 관계가 해외 직접구매 규제 혼선을 계기로 일대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총선 대패 이후 당정관계 재정립에 대한 요구가 커졌던 상황에서 정부의 설익은 정책 추진으로 해외 직구족의 거센 비판에 부딪히자 여당 지도부가 정책 주도권을 강화하겠다며 군기 잡기에 나선 듯한 모습이다.
특히 새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간 정부와 대통령실이 국민 여론 수렴 절차나 당과 사전 소통 없이 급작스럽게 중요 정책을 발표했다가, 비판 여론에 놀라 이를 철회 또는 축소해 국정 운영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잃는 일이 여러 차례 거듭되자 당에서도 "참을 만큼 참았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이른바 '빌드업'(build-up)과 맥락이 없는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고 민심과 접촉면이 가장 넓은 당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정부의 직구 규제 정책 및 철회 발표 역시 당과 구체적 협의 없이 진행된 것으로 21일 알려졌다.
그러자 결국 여당 지도부도 폭발했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전날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당정 협의 없이 설익은 정책이 발표돼 국민 우려와 혼선이 커질 경우, 당도 주저 없이 정부에 대해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집권 여당에서 정부를 향해 보낸 경고장 중 가장 강하고 직설적이었다.
추 원내대표는 이번 직구 논란과 관련해 정부와 사전 협의가 없었던 점에도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앞으로 주요 민생 정책 입안 과정에서 반드시 당과 사전 협의를 거칠 것을 주문했다.
그동안 대통령실과 정부가 이끄는 대로 정책이 추진되고, 당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뒷수습에 나섰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이를 두고 원내 관계자는 "정책 혼선이 반복될 경우 주저하지 않고 '쓴소리'를 하겠다는 경고"라고 말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주요 정책 도입 과정에서 당정 간 소통 부재, 여론 수렴과 소통 부족, 미숙한 언론 대응 등에 따른 정부의 실기가 지적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부가 느닷없이 던져놓고 수습은 여당이 주로 맡는 일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대통령과 당의 지지율은 꾸준히 하락했다. 지난 총선 참패 원인을 여기서 찾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앞서 정부는 2022년 7월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추진 방침을 발표했다가 역풍에 정책을 철회했다.
이듬해도 주 69시간 근무제, 수능 킬러 문항 폐지, 연구개발(R&D) 예산 축소 등 정부가 당정협의 없이 정책을 밀어붙이고 당이 수습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최근 의대 정원 논란과 관련, 증원분을 '2천명'으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당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측은 2천명이란 숫자를 밀어붙이다 의료계 반발만 커지자 결국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며 후퇴했다.
이런 혼선이 빚어질 때마다 당에서는 당정 협의 강화를 외쳤지만, 지금까지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하지만, 정부 반환점을 앞두고 총선 참패 성적표를 받아 들면서 비주류는 물론 친윤(친윤석열) 주류에서도 당정 소통 방식에 쇄신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비등해지는 형국이다. 실제로 고위 당정 협의와 실무 당정 협의도 대폭 확대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 친윤계 의원은 통화에서 "당정 간에 소통이 잘 되면 민심이 우려되는 지점에 의견도 낼 수 있고 좀 더 촘촘한 입법적 지원도 가능했을 것인데, 잘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정부가 대통령실만 소통하거나, 대통령실에서 '내리꽂기' 식으로 정책을 보내니까 당과 협의가 안 되고 유독 엇박자가 많이 났다"며 "국민이 바란 모습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안철수 의원은 YTN 라디오에 나와 "탁상공론 또는 정책 실패의 전형"이라며 당이 정책의 주도성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윤석열 대통령에게서도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다.
윤 대통령은 최근 기자회견과 당 지도부 및 당선인 등과 만남을 통해 당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당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드러냈다.
전날 부산·울산·경남(PK) 초선 당선인들과 만찬에서도 윤 대통령은 "당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겠다", "당의 호위무사가 되겠다", "당의 도우미가 되겠다" 등 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발언을 적극적으로 내놓았다.
최근 직구 규제 혼선 논란과 관련, 윤 대통령이 지시해 대통령실이 직접 발빠른 사과에 나서고 재발 방지책 마련에 나선 것도 과거와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여권에서는 주요 정책 현안에 대해 당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란 전망이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원을 맡고 있는 유상범 의원은 CBS 라디오에서 "정책 문제가 생겼을 때 그동안에도 당이 정부를 향해 상당히 비판적 목소리를 냈는데, 정부와 여당 간 불협화음으로 비치는 데 따른 여러 문제점을 생각해서 비공개로 해왔다"고 밝혔다.
이어 "(추 원내대표의 이번 발언은) 당이 이제는 건강한 당정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판단도 한 것 같다"며 "사전 당정 협의를 좀 더 강화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minar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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