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열 번째의 거부권 '대통령 격노'라는 유령

CBS노컷뉴스 구용회 논설위원 2024. 5. 2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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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채 상병 사건에서 대통령은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다. 마치 유령과 같은 형상이다. 대통령의 격노설은 이 사건에서 알파이고 오메가이다. 격노의 이야기를 빼놓고는 이종섭 전 장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대통령실은 채 상병이 사망이 1년이 다가오고 있지만 격노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 사실 대통령 격노에 대해 진술만 받지 못했을 뿐이지 격노의 정황들은 차고도 넘친다.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10번째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확실해졌다. 특검 법안이 절차적으로 야당 단독으로 강행처리됐고, 내용상으로 특검 후보추천권을 야당에 독점적으로 부여해 대통령 인사권을 침해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경찰과 공수처에서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검찰의 추가 수사가 개시되기도 전에 특검을 도입한 것도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젊은 장병이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채 민간지원작전을 펼치다가 어이없이 생명을 잃었다. 열 달이 지나도록 책임자 규명하나 못하는 정부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지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MBC 시사프로 <스트레이트>가 국방부 장관이 해병대 수사단에 채 상병 사건 이첩을 보류하도록 지시한 배경에 '대통령의 격노'가 있었다고 폭로한 것이 작년 8월 27일의 일이다. 대통령 격노는 박정훈 수사단장과 변호인간 녹취대화록에서 나왔다.

대통령 격노설이 제기되자 항명 논란은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국방부 장관이 명확한 이유도 없이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첩지시를 번복한 배경을 두고 의문이 풀리지 않았는데, 대통령 격노는 그 실마리를 제공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격노설이 보도된 바로 그 다음날인 8월 28일, 국방부 검찰단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을 다급하게 조사한다. VIP 격노문제를 어떡하든 봉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모양이었다. 이날은 군 검찰이 박 단장을 항명죄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 하루 전날이기도 했다.

군 검찰 조사에서 해병대 사령관은 "VIP가 언제 회의를 했는지 알 수도 없는데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다"고 부인했다. 대통령이 격노하면서 장관님과 통화를 했다는 것을 들은 적도 없는데 무슨 그런 발언을 했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얘기였다. 김계환 사령관은 박 단장이 항명죄를 벗어나려고 지언낸 낭설이라는 취지의 답변도 했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21일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채상병 사건 수사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과천=박종민 기자


그러나 박 단장이 지어낸 소설이라고 하기엔 아귀가 맞지를 않는다. 특히 대통령 격노설이 사실이 아니라면 박 단장에 대해 '상관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한 군 검찰이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대통령은 장관보다 높은 국군통수권자 아닌가. 군 검찰은 대통령 격노를 방치하고 있다.

박 단장은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7월 31일 "이런 일로 지휘관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하나'라는 얘기를 듣고 수사단 부하들과도 그 내용을 공유했다. 다들 국방부 장관의 이첩 보류지시가 나온 배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시점이었다. 해병대 수사단은 대통령 격노 얘기를 듣자마자 '예상되는 문제점'이라는 문건을 만들어 사령관에게 직보했다. 그 문건에 'BH(용산 대통령실을 의미)"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사령관은 그 문건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박 단장이 집단항명수괴로 입건 된 것은 8월 3일이다. 군 검찰과 해병대 사령관 논리라면 박 단장이 7월 31일에 이미 항명 사건을 예견하고 대통령의 격노 이야기를 지어낸 셈이 된다.

또 다른 아킬레스 건이 있다. 국방부 장관은 7월 30일 해병대 사령관에게 채 상병 수사 결과를 보고 받고 임성근 1사단장 인사문제로 해병대 사령관과 독대를 가졌다. 이종섭 전 장관은 당사자인 사령관이 증언하고 있는데 아직도 독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이종섭은 왜 독대를 부인하고, 김계환은 왜 문건을 보고 받은 사실을 부인할까. 결국에는 대통령의 격노와 죄다 연결되게 돼있다. 이종섭이 독대를 인정하면 임 사단장의 혐의를 인정해 인사조치까지도 결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김계환이 문건 보고 사실을 인정하면 박 단장에게 자신이 전한 '대통령의 격노'가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대통령의 격노가 알파이고 오메가인 이유이다.

대통령의 격노는 군림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유령이 따로 없다. 김계환 사령관과 박정훈 단장간 대질신문이 공수처에서 오늘 이뤄진다고 한다. 하필이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날 대질신문이라니 짖궂기만 하다. 김계환 사령관은 격노에 대해 초반의 강력한 부인에서 벗어나 묵비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제 구차한 유령들을 걷어낼 방법은 특검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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