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8년 지났지만…‘개념 정립’조차 못한 ‘여성혐오 범죄’ [플랫]

플랫팀 기자 2024. 5. 2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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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된 ‘강남역 살인사건’이 17일 8주기를 맞았지만 여전히 ‘페미사이드(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현상)’ 등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국가 차원의 개념 정립과 실태 파악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실태에 대한 면밀한 진단의 부재로 인한 제도적 공백은 피해자 보호와 합당한 처벌을 저해하고 있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8주기인 17일 여성단체 활동가 및 시민들이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지금 우리가 반격의 시작이 될 것이다!’ 추모행동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강남역 살인에서 숏컷여성 폭행까지…“변한 게 없다”

2016년 5월17일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해 남성은 수사 과정에서 범행 동기로 “평소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말해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경찰과 검찰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길 거부하고 피해자의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라고 밝혀 여성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여성을 겨냥한 폭력에 대한 인식 제고와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강남역 살인사건이 8년이 지난 지금도 유사한 여성혐오 범죄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경남 진주시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던 한 여성이 “페미니스트는 좀 맞아야 한다”며 폭행당한 ‘편의점 숏컷여성 폭행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은 아무 원한도 없는 여성을 무차별 공격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안겼지만, 여성혐오 사건 피해자 보호 장치가 여전히 미비한 현실도 보여줬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여성폭력방지법’에서 정한 여성폭력 범죄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선변호인을 지원받지 못했다. 법에 지원 대상이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성희롱 등의 피해자로 협소하게 정의됐기 때문이다.

📌[플랫]‘페미’라고 맞았지만 ‘여성폭력’ 지원 받지 못해…숏컷 여성 알바생 폭행 그 후

📌[플랫]‘편의점 숏컷여성 폭행사건’…피해자 “지지 않겠다” 조력자 “미안해 할 필요 없다”

전문가들은 여성혐오 범죄와 피해자 지원 공백이 되풀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실태 분석이 부족하다는 점을 꼽는다. 법·제도적으로 여성혐오 범죄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고, 실태 파악을 위한 통계 수집 등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8주기인 17일 여성단체 활동가 및 시민들이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지금 우리가 반격의 시작이 될 것이다!’ 추모행동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를 학계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촉발시켰다. 다만 법·제도적 개념 정립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경찰은 아직 여성혐오가 동기가 된 범죄를 따로 집계하고 있지 않다. 여성혐오에 대한 법률적인 정의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여성혐오에 대한 명확한 진단이 없으니 대책도 나오지 않는 것 ”이라며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고 저지르는 여러 폭력을 여성혐오 범죄로 폭넓게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념 불명확→실태 통계 부재→대책 부실 ‘악순환’

최근 들어 정부는 페미사이드 범죄 통계 도입을 위한 의지를 드러냈다. 유엔통계위원회가 개발 중인 ‘페미사이드 통계 수집을 위한 국제통계 프레임워크’를 참고해 국내에서 벌어진 페미사이드 범죄의 실태를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유엔이 마련 중인 기준은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의도적 살인’, ‘가족 구성원에 의한 살인(명예살인 등)’, ‘성차별적 동기가 나타나는 가해자에 의한 살인’ 중 1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페미사이드로 본다. 통계청 관계자는 “내년 초쯤 프레임워크를 다른 나라에 적용해 수집된 통계가 유엔에서 발표되면 한국에도 적용해 국가 통계를 개발할 수 있을지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념 정립과 실태 파악의 부재는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지원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호랑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보상·치료·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야 여성혐오 범죄 피해자가 지원을 요구할 수 있다”며 “ 아직도 그만큼의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지 않아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들이 고립된다”고 말했다.

법원이 여성혐오 범죄 처벌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양형 과정에서 가중 요소로 피해자에 대한 증오감 등이 고려될 수 있는데 판사에 따라 들쑥날쑥하다. ‘편의점 숏컷여성 폭행사건’의 1심 판결에서도 여성혐오가 양형 가중요소로 해석되지 않아 여성계가 반발한 바 있다. 위은진 변호사(법무법인 민)는 “성인지감수성을 갖춘 판사들이 양형 요소 중 ‘비난할만한 동기’로 여성혐오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선례를 만들면 후속 사례가 따라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플랫]여성혐오 살인 ‘테러’로 규정한 캐나다, 인셀 남성에 ‘무기징역’ 선고

민고은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여성이 피해자라고 무조건 여성혐오 범죄로 판단해선 안 되지만, 수사기관과 법원은 범죄에서 여성혐오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여성혐오 범죄를 국가가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독일처럼 여성혐오 범죄와 관련해 입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허 조사관은 “양형인자는 참고 사항이고 판사 재량에 맡기는 것이기 때문에 일률적일 수 없다”며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배시은 기자 sieunb@khan.kr · 오동욱 기자 5dong@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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