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가 더 비싸, 글로벌 호구”...해외 직구는 한국판 ‘소비자 운동’

석남준 기자 2024. 5. 2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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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명 브랜드 직접 뚫는 등
유통 구조 불신, 직구 열풍 낳아

대통령실은 정부의 해외 직접 구매(직구) 대책 발표로 혼선이 빚어진 데 대해 20일 공식 사과했다. 이날 대통령실 성태윤 정책실장은 “최근 해외 직구와 관련한 정부의 대책 발표로 국민께 혼란과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해외 직구가 도대체 뭐길래 정부의 대책 발표 직후 반발이 순식간에 확산되고 사흘 만에 정부가 정책을 사실상 철회한 데 이어 대통령실까지 사과의 뜻을 밝혔을까.

한국은 ‘글로벌 유통 업체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국내 유통 기업이 막강했다. 하지만 2010년대 해외시장의 문이 열리면서 소비자들의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사면 싼 걸 왜 한국에선 비싸게 사야 하느냐”는 문제의식이 생긴 것이다.

해외 직구는 ‘글로벌 호구’라고 불릴 정도로 과도하게 마진이 붙은 한국 가격에 분노하고, 손품을 팔아 한 푼이라도 싼 물품을 사려는 사람들의 욕구가 뚫어낸 새로운 유통 루트다. 해외 업체가 한국 소비자의 접근을 막으면 소비자운동을 하듯 항의하고, 현지에서 대신 구매해 주는 사람들을 찾는 등 해외 직구 시장을 개척해나갔다.

한국의 해외 직구 시장은 2009년 251만건에서 작년 1억3144만건이 돼 52배로 커졌다. 유통 불신의 구조는 그대로인데, 해외 직구 환경은 확 바뀌었다. 한국이 세계 직구 시장의 큰손으로 자리 잡으면서 해외 유통 공룡들도 한국 소비자들에게 무료 배송, 간편 구매 등의 혜택을 쏟아내고 있다. 손품 팔 필요 없이 편리해졌고, 선택의 폭은 늘면서 해외 직구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분유 사는 엄마, 오디오 사는 아저씨처럼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해외 직구라는 주제 앞에선 동질성을 보인다”며 “정보 공유에 익숙한 직구족 사이에서 불만이 확산하는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통 업계에서는 한국의 해외 직구 시장이 2010년대에 본격화됐다고 본다. 2010년을 전후해 미국 최대 쇼핑 시즌인 ‘블랙 프라이데이’ 때 직구하는 방법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다. 소비자들은 ‘미국에서 사면 저렴하다’는 정보를 공유했고, 복잡한 절차와 긴 배송 기간을 감수하며 직구에 나섰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비자들이 해외 직구를 택하는 이유는 같다. ‘왜 한국에서만 비싸게 주고 사야 하느냐’는 문제의식이다.

그래픽=양인성·김성규

◇中 8만원 커피콩 연마기, 한국선 38만원

2012~2013년에는 해외 유명 의류 브랜드가 한국 업체와의 계약 등을 이유로 한국에서의 홈페이지 접속과 한국 신용카드 사용을 막자, 소비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소비자들은 해외 브랜드 본사에 항의 이메일을 보내고,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집단 반발했다. 결국 미국 브랜드인 폴로, 짐보리 등이 한국 카드를 쓰게 해주는 등 한국 직구족(族)의 집단 반발에 백기를 들었다.

해외 직구는 “한국을 봉으로 안다”는 불만이 만들어낸 시장이라는 말도 나온다. 한국 브랜드도 마찬가지였다. 2011년 한국에서 300만원대에 팔리는 삼성·LG TV가 미국에선 180만원대에 팔리는 등 형평성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저렴한 제품을 사려고 해외 직구를 택하는 건 지금도 같다. 중국에서 8만원에 파는 커피콩 연마기는, 한국에서 사려면 38만6700원을 줘야 한다. 미국 아마존에서 1만7000원에 파는 장난감이 한국에선 최저가가 5만원이다. 위스키 마니아들은 해외에서 원래 가격의 2배 이상을 세금, 배송료 등으로 내고도 직구를 하고 있다. 그래도 한국보다 싸다는 것이다.

해외 직구는 한번 배송받을 때 150달러(미국발 200달러) 미만이기만 하면 관세·부가세를 면제해 준다. 국내 유통 업자들은 “관세, 부가세에 각종 안전 인증을 받는 데 들어가는 비용, 인건비를 더하면 해외 직구와 가격 경쟁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외 이커머스의 공습에 한국 산업 생태계가 멍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에게는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직장인 이모(41)씨는 “소비자들이 손품을 팔아가면서 뚫어놓은 해외 직구 시장 아니냐”며 “정부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소비자를 보호하겠다며 해외 직구를 막으려고 하는지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성규

◇”49달러 이상 대한민국으로 무료 배송”

작년 한국인이 해외 직구로 거래한 금액은 역대 최대인 6조7000억원을 기록했다. 숙명여대 경영학부 서용구 교수는 “이커머스 전체 시장 규모로는 한국이 5위이지만, 인구를 따져보면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가장 이커머스를 많이 이용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해외 직구 시장이 커지면서 손품을 팔 필요도 없는 상황이 됐다. 미국 아마존의 경우 현재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49달러 이상 주문 시 대한민국으로 무료 배송”이라고 떠있다. 지난 3월 국내 앱 사용자 수 1위에 오른 중국 이커머스 알리익스프레스는 가입 절차가 국내 쇼핑몰과 차이가 없다. 카카오톡, 네이버 계정으로 회원 가입을 할 수 있고, 네이버페이나 카카오페이로 결제할 수도 있다. IT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는 평이 나온다. 일부 해외 직구 제품은 인천공항에 물류 센터를 만들어 주문 다음 날이면 도착하기도 한다.

◇정보 공유에 익숙한 직구족, 불만도 들불처럼

전문가들은 정부의 정책 발표 직후 반발이 순식간에 확산된 것도 직구족의 특징에서 찾는다. 직구족은 태생적으로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데 익숙하다. 불만을 표출하고 확산하는 속도도 그만큼 빠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는 좀처럼 조직화하기가 어려운데 직구족은 좀 다른 모습”이라며 “정부의 해외 직구 정책 철회는 소비자운동으로서 역사적인 한 장면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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