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자 그림과 수도승… 강원도에 온 두 ‘명상 거장’

강릉·원주/허윤희 기자 2024. 5. 21.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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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마틴·우고 론디노네
강원도서 두 미술 거장 개인전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 백남준관에 4m 높이 ‘노란색과 빨간색 수도승’이 홀로 놓여 있다. 원형 천장에서 내려오는 자연광 아래 중세 시대 성인(聖人)처럼 서 있는 조각상을 한 관람객이 사진에 담고 있다. /뉴시스

명상과 성찰을 통해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두 세계적 거장이 강원도에 상륙했다. 지금 강릉에서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아그네스 마틴(1912~2004)의 첫 한국 개인전이, 원주에서는 스위스 태생 미술가 우고 론디노네(60)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작품을 보기 위해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이 강원도로 향하는 중이다.

아그네스 마틴, '아기들이 오는 곳'. 1999년작 '순수한 사랑' 연작 중 한 점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52.4 x 152.4cm, 디아파운데이션 ©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강릉 솔올미술관에서 열리는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은 순수한 추상을 추구했던 마틴의 주요 작품 54점을 소개한다. 영국 테이트모던 전 관장이자 올해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초빙된 프랜시스 모리스(66)가 객원 큐레이터를 맡아 화제가 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모리스는 “마틴의 예술관을 단순히 조망하는 전시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전시 제목처럼 그의 핵심적인 순간, 완벽한 순간들에 집중해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고 말했다.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객원 큐레이터를 맡은 프랜시스 모리스 전 테이트모던 관장이 지난 3일 언론공개회에서 전시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허윤희 기자

예술은 영감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마틴은 언뜻 똑같아 보이는 것을 수십 년간 그리고 또 그렸다. 캔버스 위에 자와 연필로 그린 그리드(격자무늬)는 그가 차분히 명상하며 다음 작품을 기다린 끝에 마주한 순간적인 이미지를 반영한 것이다. 전시는 1955년 마틴이 본격적으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출발한다. 1964년작 ‘나무’는 선과 격자무늬만 남은 변화를 보여주는 혁신적 작품. 한창 명성을 얻던 그는 1967년 돌연 자취를 감춘다. 뉴멕시코주 시골 마을에서 은둔하며 명상을 통해 얻은 영감을 회화로 표현했다. 2전시실에선 이 시기 그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색과 선을 무한 반복한 회색 모노크롬 8점이 걸렸다.

아그네스 마틴, '나무'(1964). 사진에는 잘 담기지 않지만 가까이서 직접 보면 수없이 그린 선과 격자 무늬가 드러난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처음 그리드를 그렸던 당시 우연찮게 나무의 순수함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다 이 격자무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그게 순수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고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90.5 x 190.5 cm, 리움미술관 ©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솔올미술관
아그네스 마틴이 1977년에서 1992년 사이에 작업한 회색 모노크롬 회화가 솔올미술관 2전시실에 걸려 있다. 전시에 나온 여덟 점의 회색 모노크롬 작품은 작가가 설정한 제한 안에서 형태, 색조, 질감의 무한한 변주를 생생히 드러내며 미학적 절정을 경험하게 한다. /허윤희 기자
아그네스 마틴, '무제 #9'(1990).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82.6 x 182.6 cm, 휘트니 미술관 ©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솔올미술관

하이라이트는 삶의 마지막 10년간 몰입했던 ‘순수한 사랑’(1999) 연작이다. 양로원에서 지내면서도 매일 작업실을 찾으며 붓을 놓지 않은 작가는 연하디 연한 파스텔 톤으로 캔버스를 화사하게 채웠다. 연필로 선을 그어 밑그림을 그린 다음, 투명할 정도로 옅어진 원색과 흰색을 사용해 붓을 움직이며 띠를 그렸다. 회색의 모노크롬 작품들과 달리 반투명한 광채와 기쁨, 삶에 대한 예찬이 담긴 생의 마지막 연작을 3전시실에서 만난다.

아그네스 마틴의 ‘순수한 사랑’(1999) 연작이 강릉 솔올미술관 3전시실에 걸린 모습. /솔올미술관

느린 호흡으로 음미해야 하는 전시다. 멀리서 보면 그저 하얀 캔버스 같지만, 조금씩 다가가면서 수없이 그어진 격자무늬, 연필로 그어진 가는 선 자국, 미세한 손 떨림까지 마틴의 세심한 작업 과정을 따라갈 수 있다. 지독한 완벽주의자가 추구했던 순수한 추상의 정수가 느껴진다. 세미나실에서는 마틴의 작업실을 찾아 그를 인터뷰한 메리 랜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세상을 등지고(With my back to the world·2003)’가 상영된다. 솔올미술관은 지난 개관전에서 루치오 폰타나와 한국 작가 곽인식을 연결한 데 이어 이번에는 마틴과 한국 단색화 거장 정상화를 함께 볼 수 있게 했다. 정상화 개인전 ‘인 다이얼로그: 정상화’도 1전시실에서 열린다. 8월 25일까지. 성인 1만원.

원주 뮤지엄 산 야외 스톤가든에 '수녀와 수도승' 연작이 자연석과 어우러져 놓였다. /허윤희 기자

◇우고 론디노네: 번 투 샤인

원주 뮤지엄 산에서 열리는 우고 론디노네 개인전 ‘번 투 샤인(BURN TO SHINE)’은 미술관 3개의 전시장, 백남준관, 야외 스톤가든에서 조각·회화·설치·영상 등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자연을 통해 정신적 사유를 추구하는 작가의 철학은 특히 ‘수녀와 수도승’ 연작에서 정점을 이룬다. 백남준관 중앙에 높이 4m 청동 조각 ‘노란색과 빨간색 수도승’이 홀로 놓여 있다. 원형 천장에서 떨어지는 자연광 아래 중세 시대 성인(聖人)처럼 서 있는 이 조각상을 사진에 담기 위해 관람객들이 줄을 짓는다.

야외 스톤가든에도 형형색색의 ‘수녀와 수도승’ 6점이 자연석과 어우러져 있다. “매일 명상을 하고 자연 속에서 보낸다”는 작가는 “수도승은 성찰하는 자의 상징이다.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며 성찰하지만 동시에 외부의 자연을 보면서 자연과 관계를 형성하는 존재”라고 했다.

우고 론디노네 개인전 '번 투 샤인' 전시장 전경. /뉴시스
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의 전통 의식과 현대 무용을 결합한 영상 '번 투 샤인'. 일몰 순간부터 일출 시간까지 춤을 추는 무용수들의 원초적 몸짓이 무한 반복된다. 이들의 의식은 불꽃이 타버리고 해가 뜨며 막을 내리지만, 바로 또 밀려오는 어둠과 함께 다시 시작된다. 삶과 죽음의 공존, 순환에 대한 은유다. /뮤지엄 산

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의 전통 의식과 현대 무용을 결합한 퍼포먼스 영상 ‘번 투 샤인’(2022)은 어둠 속 6개 스크린을 통해 상영된다. 일몰 순간 시작해 해가 뜨는 순간 끝나는 구성이 반복 재생되며 자연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뮤지엄 산 관계자는 “개막 이후 19일까지 관람객 3만5000명이 찾았다”며 “특히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이 방문하고 있다”고 했다. 9월 18일까지. 성인 2만3000원.

☞아그네스 마틴(1912~2004)

캐나다 태생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표현주의 작가.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 명상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준다. “나는 세상을 등지고 그림을 그린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고 론디노네(60)

국내외 컬렉터들에게 인기가 높은 동시대 작가. 자연과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회화, 드로잉, 조각, 설치, 영상 등 폭넓은 매체로 표현한다. 2007년 제52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스위스 국가관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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