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진화는 자연의 순리? 인위적 진화가 늘고 있다

박건형 기자 2024. 5. 2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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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가 만든 후추나방 진화, 유전자 분석으로 또다시 입증
자연 발생 아닌 인간 활동으로 급속히 늘어나는 인위적 진화
지구와 동식물 위험 외면하면 인류가 강제 진화 차례 될 수도
일러스트=이철원

영국 맨체스터 일대에는 회색 후추나방이 흔했다. 회색 후추나방은 나무에 기생하는 밝은 지의류(地衣類)에 몸을 숨기면서 포식자인 새를 피했다. 하지만 19세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아황산가스가 도시를 덮자 지의류는 사라지고 나무와 숲도 어두워졌다. 눈에 잘 띄게 된 회색 후추나방은 새의 집중적인 타깃이 되면서 빠른 속도로 줄었고, 몸을 숨기기 유리한 검은 나방이 급증했다. 공업암화(工業暗化)로 불리는 현상이다.

1950년대 유전학자 버나드 케틀웰은 오염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에 회색과 검은색 후추나방을 풀어놓았다가 포획하는 실험을 반복하면서 이 가설을 입증했다. 케틀웰의 실험은 다윈의 ‘자연선택’을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그런데 이 실험은 1990년대 후반 논란의 대상이 된다. 밤에 움직이는 나방과 낮에 활동하는 새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 풀어놓은 나방을 완벽히 포획해 개체 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비판이 쏟아졌다. 케틀웰이 나무에 나방을 접착제로 붙여놓고 촬영한 사진을 논문에 쓴 사실까지 알려지자 실험을 조작했다는 낙인도 찍혔다. 진화의 신비를 밝혀낸 실험은 창조론자들이 진화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후추나방 실험은 2015년 한국 과학 교과서에서도 삭제됐다.

하지만 후추나방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16년 리버풀대 연구팀은 후추나방 유전자 40만건을 분석해 1819년 검은색으로 색을 바꾸는 돌연변이가 발생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맨체스터에서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검은 나방이 급속히 늘어난 시기와 일치한다. 바뀐 환경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돌연변이가 생겼다는 것이다. 또 후추나방 5000마리를 추적한 대규모 실험에서는 오염되지 않은 곳에서의 회색 후추나방 생존율이 오염된 곳보다 20% 이상 높았다. 후배 진화학자들이 케틀웰의 오명을 씻어준 것이다.

후추나방은 진화가 순수한 자연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산업화가 나방의 색을 바꾼 것처럼 인간의 활동이나 선택이 동식물의 유전자를 바꾸는 것이다. 이른바 ‘인위적 진화(Anthropogenic Evolution)’다.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생물학 연구소는 베를린 중심부와 농촌 지역에서 각각 줄무늬 들쥐를 포획한 뒤 다양한 과제를 부여했다. 레고 블록집의 유리창 열기, 접시 뚜껑 열기, 플라스틱 상자 안의 종이 뭉치 꺼내기 등을 시킨 결과 도시 쥐의 성공률은 77%로 시골 쥐의 52%보다 월등히 높았다. 새로운 장소에 발을 내딛는 호기심과 용맹성도 도시 쥐가 훨씬 나았다. 고대 그리스의 아이소포스(이솝) 우화 ‘시골 쥐와 도시 쥐’에 등장하는 두 쥐의 성격 차이가 사실은 인간이 만든 도시와 시골이라는 환경 때문이었다.

스페인 파블로 데 올라비데대 연구팀은 남미에 서식하는 앵무새들의 둥지를 연구했다. 이 지역 앵무새들은 나무에 뚫려 있는 구멍에 둥지를 트는데 참나무, 너도밤나무, 소나무를 선호했다. 그런데 벌목이 잦은 지역에 사는 앵무새들은 야자나무에 둥지를 트는 경우가 많았다. 벌목되는 나무 대신,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겨 베지 않는 나무에 둥지를 틀도록 진화한 것이다. 인위적 진화의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도심의 새는 야간의 빛 공해를 피해 새끼를 낳기 위해 번식기가 훨씬 길어졌고, 고래는 음파탐지기 소리를 들으면 먹이 활동을 멈추고 숨는 법을 배웠다.

다윈의 시대에 진화학은 수만~수백만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를 관찰하고, 생명의 기원을 밝히는 학문이었다. 하지만 현대 진화학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인위적 진화의 원인과 영향을 밝히는 데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한다. 인간의 활동이 바꿔놓은 동식물이 다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새의 활동이 줄어들면 해충과 전염병이 급증하는 식이다. 저명 의학 학술지 랜싯은 2014년 “인류 문명은 그 문명이 의존하는 자연 시스템의 건강과 결코 떨어질 수 없다”며 “이제 개개인의 건강보다 ‘지구 건강(Planetary Health)’이 훨씬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선언했다. 자연의 역습이 인류의 건강과 삶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이를 거창하고 한가한 소리로 치부한다면 나방과 쥐, 앵무새 다음에 강제로 진화하는 것은 우리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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