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직구 계엄령’ 사태가 남긴 교훈[에스프레소 이동수]
그나마 빠른 철회 다행이지만 이런 부조리 개혁이 곧 민생
입술이 건조해 항상 립밤을 바른다. 가끔은 심하게 터 피부과 신세를 질 정도다. ‘외출할 때 지갑은 놓고 나가도 립밤은 챙기는’ 생활을 한 게 어언 15년, 각종 브랜드의 온갖 립밤을 다 발라봤다. 썩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 여행을 하다가 드러그스토어에서 고보습 립밤을 하나 구매하게 됐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화장품이 있듯 그 립밤도 내게 딱 맞았다. 몇 개를 더 사 한국으로 돌아왔다. 알뜰하게 다 썼다. 일본에 있는 제품이니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오프라인은 물론이고 온라인에서도 그 립밤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찾은 건 가격이 두 배 이상 비쌌다. 립밤 하나 사자고 일본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두 배 넘는 가격에 사는 건 왠지 아까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마존을 찾았다. 배송비만 약 1,400엔. 하지만 몇 개 이상 사면 국내 온라인몰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그 뒤로 아마존에서 종종 립밤을 직구(직접 구매)하게 됐다.
립밤 같은 공산품은 조금 예외긴 하지만 직구는 대체로 골치 아픈 일이다. 무명 판매자의 상품은 품질을 가늠하기 어렵고 고장 나더라도 A/S를 기대할 수 없다. 배송에 시간과 비용이 더욱 소요되는 건 물론이다. 물건이 제대로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공식 수입된 제품을 사는 게 낫다. 최소한 수입업체가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보증하고, 고장 나거나 파손되어도 수리·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직구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건 우리나라에 없는 물건이 많거나,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재화의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방증이다. 소비자들이 배송·품질·서비스 등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직구를 하는 게 더 경제적이라고 봤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내 제조업체와의 경쟁력 차이는 계속 고민해야겠지만, 알리익스프레스·테무에서 파는 것과 똑같은 ‘메이드인 차이나’ 제품을 수입업체 한번 거쳤다는 이유로 몇 배 비싼 가격에 사야 하는 건 소비자로서 썩 내키는 일이 아니다. 미국 아마존에서 한국보다 싼 한국산 전자제품을 보는 일도 그렇다. 그런 걸 보면 직구란 울분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싶다.
정부가 지난 16일 KC 인증을 받지 않은 제품 80품목에 대해 직구를 금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2030 세대가 주로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직구 계엄령’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 비판이 워낙 거셌던 까닭에 주말이 채 지나기도 전에 철회되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중요한 논쟁거리가 부상하긴 했다.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없는 물건이 많고 그나마 있는 것도 하나 같이 비싼가 하는 물음이다. 이번에 도마 위에 오른 KC 인증 제도의 비효율성, 예컨대 이미 인증된 제품의 색깔만 바꿔도 수백~수천만 원을 들여 다시 인증을 받아야 하고 다른 나라 인증 제도와도 호환되지 않는 문제들은, 우리나라 물가가 비싼 게 단지 인건비가 높고 내수 시장이 작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일은 민생이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드러내기도 했다. 정치권은 으레 청년층의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겠다며 민생을 외치고 학비·주거비·교통비 등 각종 지원 정책을 쏟아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그런 청년들이 이번 사건에 있어선 들불처럼 타올랐다. 불합리한 제도, 복잡한 유통 구조에서 파생된 높은 비용, 생산성을 올리기보다 진입 장벽을 높여 산업을 지탱하려는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까지, 그간 사회를 향해 쌓인 불만들이 터져 나온 결과다. 민생이란 특별한 게 아니라 국민이 느끼는 사회의 부조리한 부분을 개혁해 나가는 것이라는 게 이번 사건의 교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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