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칼럼]반갑다, 윤석열의 외교 ‘동문서답’

이철희 논설위원 2024. 5. 20.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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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러 간 무기거래 ‘금지선’ 묻자 뜻밖의 답변
“러와 협력할 건 협력, 원만하게 관리하겠다”
칼날 같은 직설 대신 ‘에둘러 말하기’로 변화
섬세한 대외전략으로 중-러와 갈등 관리해야
이철희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은 즉답 없는 에두르기나 엉뚱한 동문서답으로 채워진 맥 빠진 회견이었다. 그 이유는 기자들의 후속 추가 질문이 사실상 막혔기 때문이다.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진행요원은 마이크를 가져가 버린다. 마이크도 없이 “그걸 물은 게 아니고…”라고 했다간 도어스테핑 중단 같은 사태를 부를 ‘제2의 슬리퍼 기자’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하긴 1년 9개월 만의 회견이니 물을 건 많았고 시간은 짧았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대통령실의 배려로 외교안보 분야에서 독점적 질문권을 누린 외신 기자들은 최대 현안인 북한-러시아 간 무기 거래를 두고 이어달리기 식 추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먼저 AFP 기자는 최근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북한 무기 사용 증거가 속속 드러나는 데 대한 한국의 대응, 나아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할 조건이 뭔지를 물었다.

그간 북-러 무기 거래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혀 온 윤 대통령이다. 그런 만큼 미군의 빈 탄약고를 채워주는 식의 우회 지원을 넘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직접 지원하는 방안 같은 단호한 대응 의지를 밝힐 가능성에 외신은 주목했다. 한데 뜻밖에도 윤 대통령 답변의 핵심은 “공격용 살상무기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방침”이었다. 더욱이 작년 키이우 방문 때 약속한 안보·인도·재건 3대 지원에서 ‘안보’는 뺀 채 “인도, 재건 지원”만 언급했다.

BBC 기자의 추가 질문은 더 뾰족했다. 최근 주한 러시아대사의 “비우호국 중 한국이 가장 우호적”이란 발언까지 인용하며 한국이 용인할 수 없는 레드라인(금지선)이 뭔지 물었다. 그에 대한 답변도 의외였다. 윤 대통령은 “러시아와는 사안별로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반대할 것은 하면서 관계를 원만하게 잘 관리하겠다”고 했다. 이를 두고 BBC 기자는 회견 뒤 후기 영상에서 “그 답변이 놀라웠고 시사하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윤 대통령의 말이 최근 신중해졌다. 간간이 거친 말이 튀어나오긴 하지만 ‘반국가세력’ ‘공산전체주의’ 같은 이념적 대결적 언사는 거의 사라졌다. 특히나 외교 분야에서 똑 부러진 직설어법이 줄어든 것은 꽤나 낯설게 느껴진다. 4·10총선 참패의 영향이 크겠지만, 그 계기로 늦게나마 지난 2년의 대외정책을 돌아보며 얻은 깨침의 결과라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래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관계 복원을 넘어 주요 7개국(G7),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까지 서방 진영을 향한 외교에 집중했다. 북핵의 고도화, 미중 간 대결 격화, 러시아의 침략전쟁 같은 신냉전 기류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지만 그런 서방 밀착 행보는 우리 외교의 좌표를 급격하게 이동시켰다. 적지 않은 마찰음도 들려왔지만 그럴수록 정부는 강하게 중-러의 반발을 받아치곤 했다.

그 결과는 중국·러시아와의 거리 두기를 넘어선 긴장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북-러 간 ‘위험한 거래’는 유엔 대북제재 전문가패널의 임기 연장에 대한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이어졌다. 북한이 제재를 비웃으며 핵능력을 고도화하는데 최소한의 감시 수단마저 잃게 된 것이다. 러시아는 우리 교민을 간첩죄로 구금하는 ‘더러운 게임’까지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윤 대통령의 동문서답은 적어도 정부가 대러 관계에서 관리 외교에 들어갔다는 뜻으로 읽힌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한-러가 ‘우려의 균형’을 통해 서로 레버리지를 가진 형국”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북한에 군사기술 이전을,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을 자제하면서 레드라인을 지키자는 공감대를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중국과의 관계다. 지난해 윤 대통령의 대만 관련 직설(直說)과 주한 중국대사의 무례한 언동(言動) 이래 고위급 대화가 끊긴 한중 관계는 여전히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지난주 베이징을 다녀왔지만 “전반적으로 서로 다름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협력하기로 한 것이 가장 중요한 합의사항이자 성과다”라고 하니 별 소득은 없는 듯하다. 내주 윤 대통령이 주재하는 한중일 정상회의를 주목하는 이유다.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은 우리로선 가장 경계해야 할 구도다. 북한이 먼저 그 대결에 재빨리 편승했다곤 하나 우리까지 그 최전선에 나설 일은 아니다. 갈수록 커지는 북핵 위협에다 연말 미국 대선의 예측불가 변수까지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의 절제된 언어 못지않게 우리의 대외전략도 더욱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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