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걸려서라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이라하

서혜미 기자 2024. 5. 2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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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21WRITERS 이라하②] 500번은 안 되고 3000번, 이야기를 위해 그리고 또 그리고
웹툰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14화. ⓒ이라하/위즈덤하우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이라하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나, 너, 우리 평범한 정신질환자들을 위해’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514.html)◆

—그럼 주인공이 아니라 환자로 나오는 인물 중에 작가의 모습이 반영된 이가 있을까요. 

“마법사 ‘거북이’는 사실 제 이야기를 투영해서 만든 환자분이에요. 대입 수험생 시절에 온라인게임을 하루에 17시간씩 한 적이 있어요.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주먹밥이나 우유를 먹는 거예요. 그렇게 한 몇 개월씩 게임만 하면서 보내다가 수능을 보고 대학교에 갔어요. 제가 하던 온라인게임에서 소속 길드가 있었는데, 저랑 상관없는 일로 그 길드가 무너졌거든요. 같이할 사람이 없으니까 저한테 더는 이전의 그 게임이 아닌 거예요. 나중에 일하면서 게임중독으로 입원한 분들을 봤는데, 저는 ‘내가 저기 있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은 힘들어도 환자들과 마음은 잘 맞았던 것 같은데 병원을 그만두고 웹툰 작가가 된 이유는요.

“저는 병원에서 일하면서 원형탈모도 생겼고, 살도 많이 빠졌어요. 환자분들과 일하는 건 좋은데 제가 업무 처리 속도가 느렸어요. 일상적인 업무는 처리할 수 있는데 응급 상황이 터지면 내과 지식이 없으니까 손댈 수 있는 능력이 너무 부족했어요. 그런 게 고민이었어요. 30대 초중반의 애매한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학원 강사를 하면서 만화 학원을 닥치는 대로 다녔어요. 그때 인생의 실패자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죠.”

—만화 학원은 웹툰 그리기에 특화된 학원인 거죠.

“당시엔 (웹툰 전문 학원인) 와이랩 아카데미가 막 시작하던 때였어요. 스토리반과 원고반 수업을 들으면서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다른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능숙하게 작업하는데, 저는 브러시 종류도 몰라서 같은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 원고 안에서도 캐릭터 크기가 계속 이랬다저랬다 바뀌는 거예요. 기초반을 하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그 시기에 국비 지원 웹툰 학원이 여러 군데 생겨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이 “너는 그림을 너무 못 그리니까 10년 정도 있다가 와라”라고 이야기해서 그 당시에 충격을 좀 받았어요. 그런데 ‘그러면 천천히 10년 동안 그림을 연습하면서 10년 뒤에 만화가가 되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전 아직 젊으니까 10년 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마침 프로그램도 너무 어려워서 할 게 많은데 10년이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10년 동안 연습하려 했는데…

—웹툰 작가 데뷔는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만화 학원에 다니면서 이것저것 3∼4개씩 스토리를 냈어요. 좋은 평가를 못 받았는데, 종이 귀퉁이에 다람쥐 만화가 있었거든요. ‘3천만원 내놔!’라는 다람쥐에게 ‘난 3천만원이 없어요. 내가 훔친 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내용이었어요. 제게 악평했던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이 재밌다고 이걸 길게 그려보라고 해서 그리기 시작했죠. 그땐 플랫폼들이 막 생기던 참이라 피디들에게 보내면 공짜로 피드백을 준다는 거예요.

만화로 데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그 피드백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원고를 보냈는데 저스툰에서 데뷔 계약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왜 이 연재를 한다는 거지?’ 하는 의문에 휩싸였는데 제가 만화를 처음 그리는 거잖아요. 프로그램 사용하는 게 너무 서툴러서 미리 19∼20화를 그려두고 연재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처음엔 캐릭터 크기가 계속 바뀌니까, 크로키 스터디를 하던 애니메이터분께 한 편당 얼마씩 드리고 제 만화 원고 교정을 맡겼어요. 그분이 빨간 펜으로 인체 비율이나 각도 같은 걸 한 번 봐주고, 그 위에 제가 덧그리는 과정을 거쳐서 완성했어요.”

이라하 작가가 다니던 웹툰 학원 선생님에게 추천받은 책과 작업 도구. 책은 웹툰 연재를 시작하기 전 처음부터 끝까지 다섯 번쯤 따라 그렸다. 서혜미 기자

—웹툰을 연재할 때 가장 신경 쓴 요소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었는지요. 빨간 펜으로 첨삭도 받았다고 했는데 선, 채색, 스토리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전 항상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제일 중요했어요. 상대방을 웃기거나 슬프게 하거나, 기분 나쁘게 하는 게 제가 하고 싶은 거여서 그림은 그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데까지만 끌어올리는 게 우선이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만화를 그렇게 그려보지 않고서 계약하게 됐고, 연재하려면 원고를 쌓아야 하니까. 선생님한테 추천받은 책을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 그림체로 한 다섯 번쯤 베꼈어요. 그래도 별로 늘지 않았어요.

해보니까 저는 한 그림이나 한 자세를 3천 번쯤 그려야 그 그림이 손에 익더라고요. 모든 캐릭터를 다 그렇게 하진 못하고, 원고를 준비할 때 주인공이랑 거북이처럼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캐릭터들을 3천 번씩 그려보는 거죠. 이 사람이 웃거나 화내는 모습, 투약 카트를 미는 모습 같은 거요. 500번 정도밖에 안 그린 캐릭터는 확실히 어설프고 티가 나요.”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는 연락은 언제쯤 받은 건지요.

“책 1권이 출간(2018년)되고 난 다음에 받았어요. 계약 뒤 얘기만 오가다가 2022년 말에 드라마를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엄청 기뻤어요. 한편으론 걱정도 되더라고요. 웹툰을 보면서 위로됐다는 분도 있고, 오히려 상처가 됐다는 분도 있었거든요. 초반에 주인공 시나가 환자를 귀찮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중 이야기를 위한 복선이었어요. 그런데 그 부분만 보면 마음이 약한 분들은 상처를 받을 수 있잖아요. ‘연재 초부터 마음의 상처가 있는 분들은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미리 했다면 좋았을걸’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기쁘긴 했는데 상처받는 분이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편견 깨기 위한 다음 작품

원작 웹툰을 바탕으로 제작된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는 어떻게 봤는지요. 엄청 화제가 됐잖아요.

“저는 막연히 사람들이 인형탈을 쓰고 나올 줄 알았거든요. 인형탈을 안 쓰고 사람 얼굴이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얼굴에서 드러나는 표정, 움직임 같은 게 감정을 엄청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거예요. 만화를 그릴 때 제가 얼굴만이 아니라 손짓, 주변 환경도 다 고려할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결과로 나온 걸 보니까 ‘이래서 영상화를 하는구나’ 싶더라고요. 드라마 작가님이나 감독님은 저랑 비교할 수 없는, 업계에서 엄청 유능한 분들이잖아요. 전 김밥천국에서 김밥을 팔고 있는데, 갑자기 5성 호텔의 셰프가 같은 김밥 재료로 다른 김밥을 만드는 거예요. ‘이야기가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은 이렇게 했구나’ ‘사회 현상을 이렇게 풀어냈구나’ 감탄하면서 봤어요.

제 이야기는 그냥 시작점이었을 뿐이고, 감독님과 작가님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제 만화라는 껍질을 쓰고 나온 거죠. 납작한 평면의 이야기가 입체가 돼 돌아다니는 걸 보면서 저도 정말 많이 배웠어요. 그 이후엔 드라마에도 관심이 생겨서 한 방송아카데미에서 드라마 수업을 듣고 있어요.”

—차기작은 어떤 내용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 주인공 주변에 있을 것 같아요. 치료할 수 없는 정신질환이 있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조역으로 나와서 주인공과 친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다음 작품으로 보여줘야 할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자전적인 작품 하나밖에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요. 아무리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정시나와 제가 다른 사람이라고 설명해도 보지 않거든요. 그냥 ‘다음 작품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에필로그

웹툰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93화. ⓒ이라하/위즈덤하우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주인공 정시나에게서 신입사원 시절이 겹쳐 보였다. 일을 잘하고 싶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직한 동료가 되고 싶었다. 취재원에게 해가 될까 노심초사하거나, 기사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해서 안절부절못한 날이 있었다. 의도와 다르게 흘러간 일을 보면서 자책하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를 곱씹고 또 곱씹은 시간이 있었다. 주인공 시나가 느꼈던 감정은 사회초년생들이라면 언젠가 한 번쯤은 느꼈을 것이다.

이라하 작가는 2023년 11월 넷플릭스 드라마 방영을 계기로 외전 10편을 연재했다. 외전에서 시나는 자신이 맨 처음 다녔던 하얀병원 간호사 시절로 돌아간다. 미래의 시나가 꾸는 꿈인지, 아니면 정말 시나가 과거로 ‘회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외전에서 단단해진 그는 마음만 앞섰던 과거의 자신과 다르게, 능숙하게 환자들을 대하고 그들의 회복을 돕는다.

어찌 보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위로 같기도 했다. 서툴러서 우왕좌왕했고, 스스로를 미워하느라 자기 자신을 잃고 방황했던 시간까지. 모두 지금 내 모습이 되기까지 필요했던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이라하(필명) 작가의 뒷모습. 이라하 제공

*‘한겨레21이 사랑한 웹툰 작가’ 21명을 인터뷰한 ‘21 라이터스 ④’는 한겨레 네이버스토어에서 낱권 구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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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목록

웹툰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2017년 10월~2022년 10월 코미코에 연재. 현재 네이버 시리즈에서 서비스 중이다. 위즈덤하우스에서 1~3권 단행본이 출간됐고, 2023년 넷플릭스가 드라마로 제작해 공개했다.

정신병동을 찾는 환자와 그 가족,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진을 다룬 웹툰.

웹소설

<환생신의> 2023년 9월∼2024년 4월 문피아에 연재. 문피아와 네이버 시리즈에서 서비스하고 있다.

한의사 아버지, 의사 어머니를 둔 주인공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무림 세계에서 환생해 의술을 펼치는 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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