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의 벽면, 색채의 파편… 현상 그 너머 본질을 보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4. 5. 20.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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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정의 추상
독일에 터전 잡고 한국 오가며 활동
동양 수묵화 농담·서구 낭만주의 조화
구체적 형상 화풍, 점차 기하학적 변모
단순 점·선·면이 주는 균형·색채 서정성
관조적 시선으로 인간·자연 연결성 성찰

◆샌정의 추상, 언어적 세계 너머 본질을 향해

흰 벽 위에 그어 둔 몇 가닥 색의 흔적들. 삼차원 공간을 쓰다듬듯 떨어지는 색색의 획은 섬세하게 여린 강도로서, 그러나 확신에 찬 직관과 기지로서 벽면을 하나의 화폭으로 탈바꿈시킨다. 샌정(61)은 독일 뒤셀도르프를 기반 삼아 활동하는 화가다. 그의 화면은 현상의 이면에 내재한 근원과 본질을 탐구하는 주제의식 및 회화 매체에 관한 고찰에 바탕하여 제작된 결과물이다. 미적 경험의 일시성과 숭고하고 영원한 가치의 중간지대를 탐색하는 화면은 특유의 멜랑콜리(melancholy)한 정서를 자아낸다.
샌정 개인전 ‘경이로운 사각’(2024, 일우스페이스, 서울) 전시 전경. 맹지영 기획. 일우스페이스 제공
서울 부암동 소재의 전시 공간 ‘프라이머리 프랙티스’(Primary Practice, PP)에서 진행된 샌정 개인전 ‘포미더블 에어’(Formidable Air, 2024.04.06-05.19)가 최근 막을 내렸다. 2007년부터 2024년까지의 화면을 선별해 작품세계 전반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한 회고전 같은 전시다. 작품 연대기 나열을 지양하며, 공간 내에 과거와 현재의 화면이 유기적으로 뒤섞여 어우러지게끔 구성했다. 낮은 가벽을 활용해 하나의 시야 안에 중첩된 비선형적 시간대의 전경을 은유한 점이 돋보인다. 지나온 화가의 시간을 하나의 장소 안에서 마주하는 경험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작품세계를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한편 미지의 미래를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샌정 개인전 ‘포미더블 에어’(Formidable Air, 2024,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서울) 전시 전경. 김성우 기획.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제공
샌정의 초기 화면에 등장하던 구체적인 형상은 2000년대 중반 들어 점차 기하학적으로 추상화된다. PP의 디렉터이자 전시를 기획한 김성우(43) 큐레이터의 말을 빌리면 “형이상학적 대상은 참조하는 대상이 구체적일수록 오히려 그 본질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샌정은 ‘센티멘털 밸류’(Sentimental Value, 2008)에서 보이듯 여성 및 동물, 자연물 등 재현적 도상으로 주제를 시각화하고는 했는데, 이후의 화면으로 나아갈수록 견고한 형상이 지닌 언어적 의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추상의 형식을 추구하는 면모를 보인다.
샌정, ‘센티멘털 밸류(Sentimental Value)’(2008).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제공
사각의 화면 위에서 우주의 질서와 미의 본질에 관해 질문하는 작업은 그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추상의 세계에 발을 딛게” 만들었다. 추상으로 이행하는 궤적 가운데 “명시적인 도상은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작가의 태도와 관점은 보다 확장”되고, “화가가 마주하는 외부의 세계는 그에게 허가된 최초의 시공간인 캔버스 위로 옮겨지면서 형언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게” 된다. 2010년대를 지나며 화면 속 대상은 점, 선, 면으로 단순화된 기하학적 도형으로 대체되었으며, 그러한 변화는 구성 상의 균형과 색채의 서정성이 한층 더 가시화되도록 만든다.
동양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농담(濃淡)의 중첩과 서구미술의 낭만주의를 재해석한 상징들이 각각 색과 형(形)이 되어 화면 위에 어우러진다. 샌정은 관조적 시선으로 사물의 본질과 정신성을 목격하려는 동양 정신을 닮은 서양의 미술 사조가 자연에 대한 경외를 중심 삼은 낭만주의임을 언급한 바 있다. 회화의 물성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의 긴밀한 연결성에 관한 성찰을 드러내고자 한 결과물은 열린 서사와 직관적 획의 율동이 두드러지는 특유의 화면으로서 거듭난다.
샌정, ‘무제’(2022). 일우스페이스 제공
◆회색조 대기를 숨쉬는 색채의 파편들

유사한 시기 서울 서소문동 일우스페이스에서 진행된 샌정의 또 다른 개인전 ‘경이로운 사각’(2024.04.11-05.12)은 2020년부터 2023년까지의 작품 40여점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자리다. ‘무제’(2022) 등 2020년대의 근작 화면은 주로 옅은 회색조의 배경 공간 안에 떠오르는 색채의 파편을 선보인다. 색을 품은 획은 때로 아이의 순수한 낙서처럼, 때로 무엇이 스쳐 간 흔적이나 일종의 상흔처럼 은회색 공기를 비집고 자신의 모습을 내보인다.

회색조의 화면은 독일의 잿빛 하늘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먹이 스민 한국의 수묵화를 닮았다. 전시를 기획한 맹지영(47) 큐레이터의 글에 따르면 “매 순간 달라지는 빛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명암은 그림 안에서 사라지고 드러나면서 특유의 대기감을 형성”한다. 다양한 색채 및 농담의 획들이 그 대기를 부유하며 한데 모여 기하학적 도형의 형상을 이루었다가 다시 흩어져 형태 모호한 선과 면으로서 소분되기를 반복한다.

“색을 가진 영역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회색조의 분위기 안에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마치 분명하게 자리를 표시하지 않으면 곧 사라져버릴 것처럼 되도록 확실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화폭 안에서 율동을 일으키는 획의 형상들은 주로 스스로 중심이 되어 화면을 주도해 왔는데, 2021년 경을 기점 삼아 배경과 획의 거리가 점진적으로 좁혀진다. 즉 둘은 각각 중심과 주변의 우열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구성요소로서 상호작용하며 전체 화면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맹지영의 표현을 빌리면 샌정의 근작에서 목격되는 무게감은 “마치 수분을 머금은 종이의 묵직함과 같으면서도 결코 경쾌하면서 가벼운 리듬을 잃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진실을 탐색하는 몸짓으로서의 회화는 보다 근원적인 형태를 향하여, 더욱 포괄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를 위하여 정진해 나간다. 몸의 움직임과 회화의 물성이 닿을 수 있는 규모 내에서 사각의 캔버스는 저마다 고유한 우주가 된다. 순간의 표현을 위하여 기다란 이해와 고민의 과정이 필요한 탓에 샌정의 작업 과정은 그리기보다 바라봄의 시간에 큰 비중을 둔다. 모든 현상은 언제나 무척 지연된 시간 끝에서야 비로소 발생하는 법이기에 그렇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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