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그의 교지엔 반성 따윈 없었다

이남석 발행인 2024. 5. 2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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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68
임금에게 명령받을 꿈 꾼 이순신
반성도 사과도 없었던 선조의 교지
지체 없이 곡성읍으로 떠난 순신
이순신의 등장에 안도한 피란민들

판단엔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눈앞의 변수를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 인간은 신神이 아니어서다. 중요한 건 잘못된 판단을 내린 후다. 지도자라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고개를 숙이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이순신을 끌어내려 칠천량 전투의 패인을 제공한 선조는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지도자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

지도자는 어떤 결정이든 책임을 져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눈병이 난 이순신은 1597년 7월 22일 노량에서 아침을 맞고 있었는데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배설이 찾아왔다. 배설은 원균이 죽은 배경과 경위를 길게 설명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날 오후에 진주와 곤양 경계지역에 도착한 이순신은 피로에 지친 나머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엔 노량에서부터 작성한 보고서를 송대립을 시켜 도원수 권율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그후 사천 지역의 십오리원에 도착했다. 병이 들어 누워있던 배흥립(임진왜란 당시 조방장으로 참전. 후일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충청수사 등 역임)의 부인을 먼저 만나 위로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백의종군의 몸이지만 이순신은 한결같았다. 장졸과 백성들과의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구축된 이순신의 인간관계는 위기의 수군을 재건하는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이순신은 이날 진주 운곡에서 배흥립을 만나 병문안하고 함께 잠을 잤다.

7월 24일에는 삼가에서부터 이순신과 동행한 한치겸과 이안인이 근무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난 후 이홍인의 집으로 옮겼다. 여기서 도원수 종사관 황여일이 보내온 군량과 말 먹이, 편자 등을 받았고 조방장 배경남도 만났다. 25일에는 종사관에게 감사 편지를 보낸 후 조방장 김언공과 배수립을 만났다. 저녁때엔 다시 배흥립을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하동의 정개산성 밑자락으로 자리를 옮긴 26일부터는 종사관 황여일 등 여러 인사를 만나 전쟁 대책을 논의했다. 29일엔 도원수 권율이 보낸 군사들을 점검해보니 모두 말과 화살이 없었다. 이순신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며 낙담했다. 실망감이 모친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슬픔으로 이어지던 8월 2일, 이순신은 정개산성 건너편의 손경례의 집에서 잠을 자다가 임금에게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을 꾼다.

선조는 모든 잘못을 남탓으로 돌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은 선전관 양호가 가지고 온 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와 유지 등이 담긴 문서를 손에 들었다. 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오호라! 국가가 지금까지 의지해 온 것은 수군뿐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전쟁의 화를 내리고도 아직 후회하지 않은 듯, 흉악한 왜적의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대군이 한번 싸움에 패해 모두 사라졌으니 바닷가 여러 고을을 누가 지켜주겠는가. 한산도를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눈썹이 타 들어가듯 위급함이 닥쳐온 바로 지금, 시급한 방책은 도망치고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진영을 꾸리는 것이다. 그리하면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올 곳이 있음을 알 것이요, 침략해 오는 적들을 막아낼 수 있으리다.

이를 책임질 사람은 위엄과 은혜, 지혜와 능력을 갖춰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날로부터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으로 널리 알려져 변방의 군사들이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믿고 따랐다.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바꾸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지금 그대가 상중에 있는 줄 알고 있지만 그대를 기용해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자 하니, 그대는 마땅히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친 자를 찾아 집결해 군대의 형세를 갖추라.

수군이 위세를 떨치면 흩어진 민심도 다시 안정을 찾을 것이고 왜적들도 우리의 방비를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힘쓰도록 하라. 삼도의 수사 이하 전 수군을 지휘하되 만일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군법대로 처단하라."

굳이 교지의 전문을 옮겨 쓴 이유가 있다. 현재의 지도자들이 성찰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선조의 교지는 약간 미안한 감은 있지만, 당신이 알아서 수군을 재건하고 민심도 되찾으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노략질당하고 있는데도, 행간에 진정한 사과의 마음이 엿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도망간 탓과 하늘 탓을 하고 있는데, 이런 태도는 백성들의 외면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논공행상에서도 똑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의주로 함께 도망갔던 자들에겐 높은 상을 준 반면, 실제 땅과 바다에서 온몸으로 나라를 지킨 군사와 의병에겐 별다른 상을 내리지 않았다. 이로 인한 악영향도 컸다. 대표적인 게 인조 시절의 병자호란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때는 백성들이 지도자들을 외면했다.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의병으로 나서는 백성들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어찌 됐든, 선조의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지체할 수 없었다. 군관 9명, 병사 6명과 함께 곧바로 출발해 다음날인 4일 곡성읍에 도착했다. 그런데 관청과 여염집이 모두 텅 비어 있었다. 관아의 군사들은 달아나고 백성들이 피란한 탓이었다.

이 무렵 왜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뉘어 우군은 낙동강을 건너 함양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좌군은 남원을 향해 치고 올라오면서 구례까지 진출해 있었다. 5일에는 옥과 땅에 진입했는데, 길에는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걸어가는 피란민으로 가득 찼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피란하면 거기도 적병이 올지 모르고 또 깊은 산골짜기에는 도적과 맹수를 만날 수도 있으니, 다들 집에 돌아가 생업에 전념하시오. 여러분 중 젊으신 이는 나랏일이 위급하니 나를 따라 종군 출전하기를 바라오." 그 자리에서 장정 30여명이 자원했다. 백성들은 일제히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야 살았다!"라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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