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민원’은 범죄다…처벌 법률 제정해야 [왜냐면]
손선균 |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서울본부 성북구지부 교섭국장
최근 공무원에 대한 민원인들의 잇따른 폭행과 괴롭힘으로 공무원이 사망하는 피해가 이어지자 보호장치를 마련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급기야 지난 4월29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은 서울에서 ‘4·29 악성 민원 희생자추모 공무원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5월2일 정부는 ‘악성 민원 방지 및 민원공무원 보호 강화대책’(이하 종합대책)을 발표했지만 기존의 대책을 뛰어넘는 특단의 대책이라 평가하기는 무리가 있다.
첫째, 민원 업무 난이도와 처리량에 따라 민원수당 가산금을 추가로 지급하는 것은 진작부터 시행했어야 했던 것이고, 다량의 민원 신청을 제한하고 행정 업무에 인공지능(AI)을 도입하는 것은 악성 민원과 상관없이 민원 업무 개선 차원에서 도입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민원 창구에 경력자를 우선 배치하는 것은 기관마다 인력풀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적합한 경력자를 찾기 힘들고, 민원 집중 시기에 인력을 탄력 있게 운영하는 것 역시 ‘총액 인건비’에 묶여 있어 실현 가능성은 작다. 셋째, 공무상 병가 사유에 ‘악성 민원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를 명시함으로써 ‘공무상 재해 신청 절차’와 ‘공무상 요양 승인’ 결정 없이도 휴식 시간을 부여할 수 있게 됐지만 일상으로 회복하기에 6일의 기간은 짧다. 다만 민원인이 욕설, 협박, 성희롱 등 폭언을 하고 1차 경고 뒤에도 폭언을 계속할 경우 전화를 끊을 수 있도록 한 것과 민원인과의 통화 전체를 녹음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일반 민원 응대 과정에서도 유효적절한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폭언은 반복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삼진 아웃제’나 발신번호 차단까지 논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최근 경기 김포시의 한 공무원이 악성 민원과 개인정보 노출로 피해를 입으면서 전국적으로 조직도에서 직원 사진 지우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기관 누리집에 있는 직원 이름까지 지워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종합대책에서는 기관별 공개 수준을 상황에 맞게 조정하는 권고에 그쳤다. 정부는 2022년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기관장의 보호 의무(제4조)와 각 기관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할 보호 조치를 명시했으나, 각 지방자치단체의 조례 대부분에는 보호 의무·조치 내용이 없어 지방자치단체들이 악성 민원 대응에 적극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악성 민원 가운데 일부는 민원 행정 처리의 구조적 문제가 원인으로 작용한다. 담당 부서에서 논의를 거쳐 불가로 결정한 사안조차 권력기관에 민원을 넣으면 뚜렷한 상황 변화나 이유가 없음에도 처리되는 구조에서는 통상 민원도 악성 민원으로 변질한다.
악성 민원이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악성 민원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정당한 업무 수행 중인 근로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경우, 직업의 특성을 반영해 별도의 처벌 법규를 두어 근로자를 보호하는 법률을 시행해 왔다. 운행 중인 버스 기사를 폭행하면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고, 응급실 의료진을 폭행하면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로 처벌한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경우 안전·보호 조치 의무를 소홀히 한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중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별도의 법률 제정까지 가능했던 이유는 안전·보호 조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근로자에게 중대재해를 입히는 것이 범죄라는 인식과 함께 더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전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 보도자료를 보면, 한 해 동안 발생하는 악성 민원이 4만건 이상(2020년 4만6079건→2021년 5만1883건→2022년 4만1559건)으로 나타났고, 최근 실시한 ‘대국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3.2%가 ‘민원인의 폭언, 폭행 등으로부터 민원공무원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직원들이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그만두고 죽어야만 법률을 제정할 것인가?
뒤늦게나마 이번 종합대책에서 악성 민원의 개념을 정립하고 유형별 대응 방안까지 마련한 정부가 맞춤형 예방과 대응 계획을 수립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예방 차원에서 공익광고 등의 홍보수단을 활용해 인식 개선을 추진하고, 공무원 노조가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의견을 수렴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기관의 책임을 강화하고 악성 민원으로 판단하는 경우 기관장의 고발 의무를 명시함으로써 피해 공무원 보호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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