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끌려가 죽을 수 있었다

한겨레 2024. 5. 2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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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3화 강제징집
1980년대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에서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전투경찰 간에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1980년초 대학가 정보기관이 장악
전두환의 탄압 더욱 거세졌지만
그럴수록 학생운동은 더욱 성장
이념 써클에서 학과 중심으로 변모

1983년 4·19 다음날 경찰에 연행
선배 거취 추궁당하며 두들겨 맞아
신체검사도 생략된 채 강제징집
어이없게도 전두환의 용병으로

강원도 양구에서 휴전선 철책 근무
대학 다니다 왔다고 하니 모진 구타
엉덩이 피 터져 팬티에 달라붙어
서러움 몰려와 화장실에서 울어

맷집 부족했다면 군에서 죽었을지도
영하 30도 이하 대암산 격고지 근무
군 생활 막바지 노동자 파업 소식에
민중 깨어난 현장으로 달려가고파

1980년대는 공포의 시대였다.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은 폭력통치로 일관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1981년 5월27일 김태훈이 도서관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몸을 던졌다. 1982년 10월12일에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이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0일간의 옥중투쟁 끝에 사망했다.

학교와 학교 주변은 경찰과 정보기관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가서 학습 세미나를 했다. 언제고 미행이 붙을 수 있었다. 늘 뒤를 조심해야 했다. 불시에 잡혀서 고문당할 수도 있고, 그러다가 조직을 불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빡센 학습을 통해서 사상 무장이 되었다고 해도 늘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인가? 우리는 더 강해져야 했고, 더 자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앞서간 열사들의 뒤를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민주주의여 만세’를 노래하면서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려고 했다.

도서관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던 선배도, 대강당의 지붕 아래 아슬아슬하게 발 겨우 딛고 올라서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던 시위 주동자도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갔다. 매번 학내외의 시위가 시작되기 직전 맥박과 호흡은 빨라졌다. 그러다가 시위가 시작되면, 나도 모르게 선두에 서서 스크럼을 짰다. 최루탄 연기 자욱한 서울의 거리와 연세대학교 백양로에서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과 싸우는 시위가 잦아졌다. 운 좋게 나는 시위현장에서 잡히지 않았다. 1학년 때 도서관 화장실에서 광주 5·18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바들바들 떨면서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미 그런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지만, 그럴수록 학생운동은 더욱 성장했다. 1970년대의 학생운동은 이념써클 중심이었다고 한다면, 1980년대부터는 학과 중심이었다. 학과에 다양한 학회를 만들어나갔다. 1983년에 나는 국문과 학회장(지금으로는 학생회장)이 되었다. 학생들과 두루두루 관계가 좋고 부드러운 이미지(사실은 편한 분위기)가 있어서 대중적인 과 학회장에 적임자라고 했다. 신입생들이 들어왔고, 다양한 종류의 학회에 75명 중 60명이 가입해서 활동했다. 나는 학회장으로 그들의 집 전화번호를 모두 외웠다. 그들과 학습세미나도 같이 하고 점심을 같이 먹었고, 노천극장에 가서 공동체 놀이를 즐겼다. 그러다가 신촌의 운동권 아지트 술집인 ‘훼드라’에 신입생들을 몰고 찾아갔다. 그럴수록 훼드라에는 외상 술값이 쌓여갔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연세대 학생운동 내에서는 국문과 학회가 가장 모범적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매일매일이 신나는 날들이었다.

1984년 5월10일 대학생들이 서울시내 중심가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국문과 학회장이 되어

1983년 4월19일, 4월 혁명 23주년이었다. 그날 점심 학생회관 식당에서 우리 과를 지도했던 홍미선 선배가 시위를 주동하기로 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는 척 식탁에 앉아 있었다. 선배가 식탁에 올라서면서,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순식간에 스크럼을 짜고, 백양로로 나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백양로에는 23년 전 이승만 독재에 맨손으로 맞서다 죽어간 선배들의 선혈처럼 진달래가 붉게 피어 있었다. 그러다가 경찰이 우리를 진압하기 위해 덮쳤고, 우리는 흩어졌다.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게릴라성 시위가 계속 됐다. 백양로 주위에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박수를 치고, 구호도 따라 외치기도 했다. 경찰이 뛰어오면 군중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런 사이에 선배는 잡히지 않고, 유유히 학교 정문을 빠져 나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만, 당시 도서관에서 학회 총무를 맡고 있던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시간에 맞춰서 학교로 갔다. 도서관에 들어가는데, 서대문경찰서 담당이 나를 잡았다. 그 길로 서대문경찰서 조사실에서 선배의 거취를 추궁 당했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게 1주일 동안 경찰서 조사실에서 두들겨 맞았다. 그 시위로 같이 연행됐던 남자 4명은 4월28일 아침에 강제징집됐다. 신체검사 등 모든 절차는 생략된 채 나는 병무청에서 마련해온 입영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중에는 고등학교 친구 노항래도 있었다. 그와는 소양강에서 헤어졌다. 노항래는 22사단으로 나는 21사단으로. 학교동기 정성희가 앞서 말한 1981년 11월25일 시위로 강제징집됐다가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한 1982년 6월, 의문의 죽음으로 돌아온 뒤였다. 우리는 감옥에는 가더라도 절대 군대는 가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어처구니없이 전두환의 용병으로 끌려갔다.

1980년대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전투경찰 간에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전방에서 보낸 2년 3개월

‘특수학적변동자’로 분류된 강제징집자(강제징집과 녹화사업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들은 모두 예외 없이 전방에 배치됐다. 나는 강원도 양구의 휴전선 철책을 지키는 소대에 배치됐다. 오전에는 취침을 하고, 오후에는 경계근무와 작업 등을 한 다음, 해가 질 무렵부터는 야간 철책근무에 들어가는 생활이었다.

철책 근무 첫날, 철책 앞에서 신고식이 있었다. 고참이 사회에서 뭐하다가 왔냐고 물었다. 대학교 다니다가 왔다고 했더니 기가 차다는 듯이 나를 두들겨 팼다.

“그래, 어느 대학 다니다 왔는데?”

“연세대학교 다니다 왔습니다.”

군기 바짝 든 이등병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게 거짓말이라고 흠씬 두들겨 맞았다. 다음날 아침 점호를 마친 다음 화장실로 급히 달려가서 큰일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팬티가 내려가지 않았다. 전날 두들겨 맞은 엉덩이가 터져서 팬티가 달라붙어 있었다. 얼마나 아프던지, 참고 참았던 서러움이 몰려왔다. 냄새나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울다가 약해져서는 안 된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당시 전방에는 중졸, 고졸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가난한 집안의 청년들이었다. 가장 험하고, 보급이 가장 시원치 않은 전방, 거기에 폭력은 일상이었다. 한때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가 있었다. 주인공이 우리 또래 청년이었다. 영화처럼 우리는 맷집이 부족했다면 군대에서 죽었을지 모른다.

그 군대 생활 중에 가장 기억이 남는 사람이 있다. 박주재 병장이다. 그는 마산의 오뎅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고, 두 기수 위의 고참이었다. 그가 일병 고참일 시절에 우리는 모아놓고 다짐을 받았다.

“우리는 고참들한테 맞더라도, 밑에 애들 안 때린다. 맞는 건 우리 대로 끝내자.”

그 다짐을 그는 실천했다. 고참들이 애들 교육(기합과 구타)을 안 시킨다는 이유로 그와 우리들을 두들겨 팼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실천했다. 우리 소대는 구타가 없는 소대로 바뀌었다.

여름철 전후로는 지오피(GOP)에서 근무했고, 가을부터 봄까지는 해발 1304m의 대암산에서 격고지 근무를 했다. 한겨울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졌고, 눈은 막사 지붕까지 쌓였다. 1983년 10월 아웅산테러 때는 군화도 벗지 못하고 비상근무를 서는 날도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바깥소식을 들었다. 대우자동차 노동자파업(1984) 소식도 들었고, 군 생활 막바지에는 구로동맹파업(1985) 소식도 들었다. 노동운동이 살아나고 있었다. 민중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 현장으로 빨리 가고 싶었다.

1985년 8월1일, 나는 전방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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