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발표 → 철회 → 사과… 언제까지 이럴건가
윤정부 들어 유독 이런 사례 잦아
"공청회 등 실질적 소통 강화 필요"
하향식 결정에 실무진 검토 못해
정부가 설익은 정책을 내놨다 철회하고 사과하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 대통령실이 20일 KC인증(국내안전인증)을 받지 않은 해외직구를 금지한다는 조치를 사흘만에 철회한 데 대해 사과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불편이 없도록 필요한 조치를 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앞서 최대 근로시간 확대, 초등학교 입학연령 하향조정 사례에서 보듯 정책 발표를 하고 철회한 경우가 적지 않다. 정책 수요자의 의견을 무시한 채 어설프게 추진한 게 역풍을 불렀다. 이런 시행착오는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를 떨어뜨리고 민심이반을 부른다는 점에서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현안 브리핑을 갖고 "최근 해외직구와 관련한 정부의 대책 발표로 국민들께 혼란과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 먼저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국조실은 지난 16일 인천공항 세관에서 개최한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에서 어린이용품과 전기·생활용품, 생활화학제품 등 80개 품목에 대해 국내 인증이 없으면 해외직구를 차단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앞서 지난 3월 국조실은 이정원 국무2차장을 팀장으로 '해외직구 종합대책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해외직구 KC인증제 도입은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공정거래위원회, 관세청, 식품안전의약처,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 15개 부처가 참여한 '매머드급 TF'를 두달 간 운영한 결과였다.
그러나 사흘 뒤인 19일 국조실은 이례적으로 일요일에 긴급 브리핑을 열고 "해외직구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위해성이 확인된 제품의 반입을 차단한다는 의미"라고 정정했다.
정부의 소비자 안전을 위한 조치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소비자 안전을 지키면서 더불어 국내 기업 생존을 위협하는 덤핑 제품을 차단하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부 의도가 좋고 소비자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시장이 작동하는 현장을 도외시한 정책은 부작용을 부른다.
윤 정부의 정책 번복은 잦은 편이다. 윤석열 정부 초기인 2022년 7월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만6세에서 만5세로 낮추는 학제개편안을 내놨으나 논란이 불거지자 철회했다. 이로 인해 윤석열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이었던 박순애 전 장관은 취임 34일 만에 사퇴했다. 정부는 또 지난해 3월 주 최대근로시간을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늘리는 연장근로 단위 개편안을 확정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노동계뿐 아니라 학계와 정치권의 반발이 커지자 기존의 주52시간제를 유연하게 탄력·운영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사실상 주 69시간제를 폐기했다.
R&D 예산은 올해 4조6000억원 축소했다가 반발이 커지자 내년 예산에서는 역대급으로 확대하기로 하고, 예비타당성조사까지 면제하기로 해 오락가락 정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청년 연령 상향도 발표 당일 멈춰 세웠다. 지난 3월 5일 국조실은 출입기자단에 공지 문자를 보내 '청년 연령 상향 검토와 관련된 내용을 보도자료에서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원래 윤석열 대통령은 청년 민생토론회를 주재하면서 핵심 정책으로 청년 연령을 34세에서 39세로 높이는 방안을 발표하기로 했고, 토론회 전날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이 관련 내용을 사전 브리핑까지 한 상황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각종 세제 지원과 자산축적·고용·청약·임대 등 전방위적인 정책 수혜를 받는 청년 연령을 높여 표심을 확보하려다 뒤늦게 정책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나오면서 급하게 중단한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 기업의 사익편취 행위에 관여한 총수 일가(특수관계인)를 원칙적으로 고발하도록 지침을 강화하려다 재계 반발로 70일 만에 거둬들였다. 서울~양평간 고속도로 역시 특혜 논란이 불거지자 예비타당성조사까지 통과한 국책 사업을 백지화했다.
보안을 명목으로 정책 수립에 참여하는 각 부처 담당자 사이에 '칸막이'를 치고, 민심을 듣지 않는 탁상행정으로 이같은 사태를 초래했다는 분석이다.대다수 부처는 청년 관련 정책이나 제도를 갖고 있다. 그만큼 청년 연령 상향을 결정하기 전에 풀어야 할 이해관계가 많은 상황에서 형식적인 의견 청취만 거친 후 '정책 통보'를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 국장급 공무원은 "사실 국조실 정책은 참여하는 당사자들조차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지 모르게 할 정도로 보안에 치중한다"며 "아무도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채로 정책을 발표하다 보니 부작용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위해 제품 반입을 막는다는 정책 취지는 틀린게 아니지만,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인만큼 사전에 공청회나 여론 수렴 과정이 충분히 있어야 했다"며 "앞으로는 정부 당국자들이 정책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실질적인 소통을 강화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의사결정이 탑-다운(하향식)으로 되다보니 실무선에서 충분한 검토를 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정책결정이 이렇게 되면 안된다"며 "의사결정 체계가 바뀌지 않으면 똑같은 상황이 또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김미경·최상현기자
the13ook@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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