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참사의 진상을 가리는 '처벌의 망령'
참사 근본원인 못 찾고
미래 사고 예방도 못해
이태원 특조위는 달라야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난 2일, 나는 10년 전 4월의 하루를 떠올렸다. 보름에서 하루가 지난 그날, 세월호에 탔던 304명의 꽃다운 생명이 바다 밑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1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 참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중앙해양안전심판원에 따르면 해양 사고가 2015년 2101건에서 2023년에는 3092건으로 증가했다. 인명 피해도 395명에서 518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국민은 무심해 보인다. 참사에는 정권을 흔들 정도로 분노하는 국민이 몇몇의 사망과 실종이 켜켜이 쌓이는 상황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쌓이는 사고가 참사의 전조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이 같은 안전불감증 때문에 바다 위 참사가 서울 도심 이태원으로 장소를 옮겨 꽃다운 젊은이들이 희생된 것 같아 비통하다.
눈을 감으니, 분노에 휩싸였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뒤집힌 배가 한참을 바다에 떠 있는데도 학생들을 구하지 못한 정부 책임자들에게 분노했다. 깊은 바닷속에 차가운 몸을 뉜 학생들이 쓰던 책상에 놓인 꽃 사진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책임 있는 자들이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 다수도 그랬던 거 같다. 학생을 구하지 못한 해경과 정권에 비난이 쏠렸고 처벌을 요구했다. 검찰도 대규모 수사로 응답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껏 참사의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나는 우연히 집어든 책 '어려운 대화'를 읽는 중에 그 단서를 발견했다. 더글러스 스톤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책에 이렇게 썼다. "비난은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법적으로든 기타 방법으로든 일단 '처벌의 망령'에 사로잡히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진실을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 순간,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참사에 책임 있어 보이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처벌하라고 했던 나 자신이야말로 진상 규명을 막는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스톤 교수는 "비난에 집중하면 근본 원인을 찾는 게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너무 많은 화물·승객을 태운 탓에 선박 사고가 발생했다고 해보자. 사고가 난 뒤에 그렇게 승객을 태운 선주를 찾아내 처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선주가 과연 근본 원인일까. 화물과 승객을 줄여 태우면 여객·화물 운임이 오를 것이다. 그 운임 인상은 모두가 싫어한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과적을 방치하는 것이라면, 사고의 근본 원인은 운임 상승을 거부하는 우리 자신이다. 처벌에 집중하면 발견할 수 없는 진실이다.
처벌의 대상이 된 이들이 사과를 거부하고 비협조적이 된다는 점도 문제다. 스톤 교수는 자동차 사고를 예로 들었다. "고소당하게 될 자동차 회사는 안전성을 개선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안전성을 개선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면 사고가 나기 전에 어떤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회사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세월호 참사 당시 정권을 반대하는 이들은 그 책임을 물어 정권을 흔들었고, 정권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양쪽 모두 자기편에 불리한 진실에는 눈을 감으려고 했다. 이래서는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될 수 없다.
스톤 교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의 진상이 밝혀진 것은 처벌의 망령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가해자는 진실을 밝히면 사면을 받았다. 그 덕분에 진실을 말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스톤 교수는 "범죄 수사·재판만을 수행했다면 학대의 진상이 지금처럼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태원 특조위의 목적은 진상을 규명해 미래의 참사를 막는 데 있다. 처벌이 아니다.
[김인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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