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지엔 이 티셔츠 어울려요"… 로봇이 옷을 건넸다
인간 모습을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을 놓고 글로벌 경쟁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특징은 생성형 인공지능(AI)과 로보틱스(로봇)가 만나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로봇이 물건을 집어 새로운 위치에 내려놓는 수준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상황을 인지·예측하고 인간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로봇의 두뇌 역할을 하는 AI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로봇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넥스트MSC에 따르면 전 세계 AI 로봇 시장 규모는 2021년 956억달러(약 129조원)에서 2027년 1580억달러(약 213조원)를 거쳐 2030년 1848억달러(약 249조원)로 연평균 30% 이상 성장할 전망이다. AI 로봇 시장은 △산업용 △서비스 △의료용 △군사용 △교육·연구용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특히 요즘 각광받는 분야는 서비스 영역에 속하는 '지능형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2월 발간한 '글로벌 자동화: 휴머노이드 로봇'이라는 보고서에서 "AI 발전으로 휴머노이드 로봇은 전기자동차와 스마트폰 다음으로 일상생활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기술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로봇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미국은 보스턴·피츠버그·실리콘밸리 중심의 '산학연' 민간 로봇 생태계를 육성하고 있다. 또 정부 차원에서 연구개발(R&D)과 제조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미국에서 이뤄진 로봇 투자는 2021년 기준 200억달러 규모로 전 세계 투자액의 60%를 차지한다. 국가로봇이니셔티브(NRI 2.0) 추진을 통해 대학을 비롯해 산업계와 비영리 조직, 스타트업 등 민간 협력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난 3월 미국 로봇 개발 스타트업 '피규어AI(Figure AI)'는 자사 휴머노이드 로봇 '피규어01'을 선보이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개된 시연 영상에선 로봇이 사람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면서 사과(과일)를 건네고, 쓰레기를 치우는 동시에 접시를 식기건조대에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로봇의 행동이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여기엔 수많은 인지 과정이 담겨 있다. "먹을 것을 줄래"라는 질문을 알아들으려면 자연어 이해 능력이 필요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을 구분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나아가 사과를 선택해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물리적 동작도 수반한다. 로봇은 업무를 수행한 뒤 자신의 행동에 대해 "꽤 잘한 것 같다"며 마치 사람이 감정 표현을 하듯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2022년 설립된 피규어AI는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아마존, 인텔 등에서 6억7500만달러(약 9100억원)를 투자받았다. 올해 초부터 오픈AI와 협력해 차세대 지능형 로봇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오픈AI와 MS의 AI 기술이 로봇에 접목됐다. 한마디로 피규어01에 두뇌가 장착된 셈이다. 단순 동작만 할 줄 알던 피규어01이 '생각하는 로봇'으로 완전히 변신하기까지 불과 2주도 채 걸리지 않았다.
중국의 도전도 주목된다.
차세대 기술 영역인 '지능형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을 놓고 미·중 간 패권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제조·물류 분야뿐만 아니라 군사안보 지형까지 바꿀 수 있는 '노동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미·중 양국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형세다.
지난 4월 중국 최대 검색 엔진 기업 바이두는 중국 로봇 제조사인 유비테크(UBTECH)와 손잡고 개발한 휴머노이드 로봇 '워커S'를 전격 공개했다.
바이두의 대형언어모델(LLM) '어니 4.0'을 탑재해 마치 사람처럼 상황을 인지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바이두도 워커S의 시연 영상을 공개했다. "내일 출장을 가야 하는데 챙길 옷을 정리해줄래"라고 부탁하자 사람 형체의 로봇이 티셔츠를 곱게 접어 주인에게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곧이어 "이 티셔츠가 어떤 색상의 바지와 어울릴까"라고 묻자 로봇은 "상의 색깔을 고려하면 전반적으로 어두운 계열의 바지가 어울릴 것 같다"고 대답했다. 바이두 창업자인 로빈 리 회장은 중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바이두의 LLM은 챗GPT와 비교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며 "바이두의 LLM이 결합된 워커S는 휴머노이드 시장에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달 간격으로 미국과 중국이 연달아 휴머노이드 로봇을 공개하자 시장에선 양국이 글로벌 AI 로봇 시장을 두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빅테크들은 로봇 AI 모델 개발에 열을 올리는 동시에 로봇 스타트업 투자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로봇 두뇌'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 구글은 올해 초 로봇을 위한 AI 모델인 '오토RT'를 공개했다. 프로그래밍이나 별도의 훈련 없이도 스스로 학습해 명령을 이해하는 로봇 특화 AI 모델로, 지난해 7월 공개한 로보틱스 트랜스포머2(RT-2)의 차기 버전이다. 오토RT에는 RT-2에다 영상언어모델(VLM)과 LLM이 적용됐다. 로봇이 카메라로 인식한 영상을 VLM이 분석하고, 로봇이 수행할 임무를 LLM이 생성해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로봇에 '종이를 자르고 싶은데 가위가 없다'고 말하면 카메라 센서로 물건을 인식해 주변에 있는 문구용 칼을 건네는 식이다. 구글은 카메라로 수집한 정보를 더욱 효과적으로 처리해 로봇의 판단 속도를 높이는 신경망 아키텍처인 '사라-RT'에 대한 업그레이드 작업도 하고 있다.
MS는 최근 캐나다 로봇 기업 '생크추어리AI'와 손잡고 범용 휴머노이드 로봇을 위한 AI 모델 개발에 들어갔다. 생크추어리AI가 개발한 로봇 '피닉스'는 카본이라는 AI 제어 시스템을 적용해 인간의 행동 데이터를 정교하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사는 MS 애저 클라우드를 활용해 대규모행동모델(LBM)을 연구하고 있다.
이달 초 엔비디아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및 텍사스대 연구팀과 함께 로봇 훈련을 가속화하는 기술 '닥터유레카'를 공개했다. 이 기술은 지난해 엔비디아가 공개한 로봇 훈련 알고리즘을 자동으로 생성하는 AI 에이전트 '유레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닥터유레카는 로봇이 습득하고자 하는 기술을 LLM을 통해 가상 환경에서 훈련시킨 후 실제 환경에 적용하는 일련의 작업을 자동화하는 기술이다. 엔비디아가 닥터유레카를 통해 로봇 개에게 네 발로 걷는 기술을 훈련시킨 결과 기존보다 보행 속도가 34%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하드웨어인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한 보스턴다이내믹스는 지난 4월 기존 유압식이 아닌 전기 모터로 구동되는 신형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공개했다. 강화학습, 컴퓨터 비전 등 AI 기능이 탑재된 아틀라스는 현대차의 차세대 자동차 제조 공정에 투입될 예정이다. 테슬라는 2022년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1세대를 처음 선보였고, 지난해 말엔 전작보다 10㎏ 가볍고 보행 속도가 30% 빨라진 2세대 모델을 공개했다. 테슬라는 올해 안에 옵티머스 2세대를 테슬라 공장에 전면 투입할 계획이다.
[김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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