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외무 장관 모두 잃은 이란, 나라 안팎에 혼란 불가피
악천후에 낡은 기체로 추락 추정, 탑승자 9명 모두 숨져
일단 부통령이 직위 승계하고 50일 안에 새 대통령 뽑아야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후계자였던 라이시 사망으로 후계 구도 혼란
이란 밖으로는 강경 反 서방 기조 강해질 듯
[파이낸셜뉴스] 임기를 약 1년 남겨둔 이란의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갑작스러운 헬리콥터 추락으로 사망하면서 이란 안팎에서 정치적 혼란이 예상된다. 이란 정부는 강경 우파 세력이자 차기 '최고지도자' 후보였던 라이시가 사라졌지만 의회가 우파 손에 남아 있는 만큼, 계속 서방 및 이스라엘과 적대하는 정책을 유지할 전망이다.
향년 63세인 라이시는 전날 이란 북서부 동아제르바이잔 주(州)에서 열린 기즈 갈라시 댐 준공식에 참석했다. 그는 행사 이후 일행과 3대의 헬리콥터를 이용해 주도 타브리즈의 정유공장으로 이동했다. 2대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그가 탑승한 헬리콥터는 이란 중부 바르즈건 인근의 디즈마르 산악 지대에서 연락이 끊겼다. 당시 사건 현장에는 짙은 안개 속에서 폭우가 몰아쳤다. 이란 구조팀은 연락 두절 이후 12시간 만에 완전히 불에 탄 잔해를 발견했으나 생존자를 찾지 못했다. 범 아랍 매체인 알자지라 방송은 전문가를 인용해 악천후가 이번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아마드 바히디 이란 내무 장관도 헬리콥터가 "악천후와 안개로 인해 경착륙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날씨가 사고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추락한 헬리콥터는 미국 기업 '벨 헬리콥터'가 개발한 '벨-212'로 1968년에 초도 비행을 실시한 낡은 기종이었다. 미국에게 온갖 제재를 받고 있는 이란이 어떻게 미국 기체를 운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 정부가 무너지기 전까지 많은 미국산 항공장비를 도입했다. 남은 기체 상당수가 낡은 데다 부품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추락 당시 헬리콥터에는 라이시 뿐만 아니라 호세인 아미르 압돌라히안 이란 외무 장관, 말리크 라흐마티 동아제르바이잔 주지사도 탑승했다. 이외에도 타브리즈 지역 성직자로 금요 기도회의 이맘(이슬람 종교 지도자)을 맡고 있는 아야톨라 알 하솀이 동승했으며 조종사와 경호원 등 탑승했던 총 9명 모두 사망했다.
지난 2021년 8월에 8대 대통령에 취임한 라이시는 강경 우파 성향으로 4년 임기 가운데 약 1년을 남긴 상황이다. 부통령이 12명인 이란은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할 경우 헌법 131조에 따라 제 1부통령이 최고지도자의 인준을 받아 대통령 역할을 수행한다. 부통령과 국회의장 등이 참여하는 위원회는 최대 50일 안에 새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이란의 제 1부통령은 하메네이의 충성파로 알려진 모하마드 모르베크다. 모르베크는 올해 69세로 2007년 준 정부 금융기관 '세타드' 수장에 임명돼 14년간 이끌었다. 세타드는 이슬람 혁명 이후 몰수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1980년대 후반 설립되었으나 사실상 최고지도자의 '돈줄' 역할을 하는 기업 조직이다. 세타드는 보건, 금융 등 다양한 기업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년 수십억달러를 벌어들인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모르베크가 라이시를 이어 계속 대통령 직위를 이어갈 수 없으며 후계자 후보가 아니라고 진단했다. 올해 85세인 하메네이는 이미 고령에다 지병도 있는 상황에서 그 동안 후계자로 키웠던 라이시가 사라지면서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이스라엘 영자지 타임스오브이스라엘(TOI)은 라이시 사망 이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이란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라이시를 제외한 최고 지도자 후보로는 하메네이의 차남인 모즈타바 하메네이(55세) 등이 거론되고 있다.
아울러 지난 3월 이란 총선에서는 서방에 반대하는 강경 우파가 245석의 이란 의회에서 약 200석을 차지했다. 가디언은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의회를 장악한 우파가 더욱 강경한 반서방 노선을 요구한다고 내다봤다. TOI는 라이시와 함께 사망한 아미르 압돌라히안을 지적하며 이란의 외교 노선이 흔들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스라엘 사태 이후 지속적으로 가자지구 무장정파 하마스,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 등과 접촉하며 이스라엘 및 서방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하마스는 20일 성명에서 이란 국민과 "고통과 슬픔"을 함께한다며 "이란과 완전한 결속"을 강조했다. 같은날 알자지라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가 현재 이스라엘과 서방에 대한 노선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사태 이후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 변화에 주목했다. 미국 등 6개국과 이란은 2015년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체결하고 이란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경제 제재를 풀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2018년에 핵합의를 탈퇴하고 경제 제재를 복원했다. 라이시는 2021년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핵합의 복원 협상을 진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대신 긴장 강도를 높였다.
한편 라이시의 사망이 확인되자 이란과 교류했던 일부 정상들은 애도를 표했다. 20일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X에 "라이시의 '비극적인'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적었다. 그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면서 "라이시는 인도와 이란 양국 관계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고 밝혔다. 이란과 함께 반미 전선을 이뤘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라이시가 "베네수엘라의 조건 없는 친구였다"면서 "베네수엘라는 진심 어린 포옹을 보낸다. 당신, 이란은 존엄성과 도덕성, 저항의 본보기였다"고 강조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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