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자유는 양들의 죽음이 될 수 있다 [시민편집인의 눈]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학자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회고록 ‘노무현과 함께한 1000일’에 따르면 그는 참여정부의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이 될 뻔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여러 국내 행사에서 기조 강연을 맡는 등 한국을 관찰하고 조언해왔다. 그가 지난달 ‘자유로 가는 길’(The Road to Freedom)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미국 정치·경제를 다룬 책이지만,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로 봐도 될 이야기가 가득하다.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언급한 윤석열 대통령이 꼭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늑대의 자유는 종종 양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영국 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한 말을 스티글리츠는 책에서 거듭 인용한다. 정치인이 자유를 말할 때, 그것이 ‘누구의 자유인가’를 따져야 한다는 취지다. 소수 강자의 자유는 다수 약자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농장주에게 ‘노예를 부릴 자유’를 주는 것은 흑인이 가축처럼 착취당하는 삶을 승인하는 것이다. 금융회사에 파생상품 등으로 ‘마음껏 투기할 자유’를 주면 2008년 경제위기 때 봤듯, 노동자·서민이 일자리와 집을 잃는 파탄이 따라온다. 부자에게 ‘세금 덜 낼 자유’를 주면 공공재와 복지 삭감 등으로 취약계층의 삶이 비참해질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누구의 자유인지 명시하지 않았지만, 이후 정책은 대부분 ‘강자의 자유’를 추구한 것이었다. 집과 땅이 많은 자산가의 종합부동산세 부담을 줄였고, 주식 부자들의 양도세 부담도 줄여주었다. 상속재산이 많은 이들의 세금 부담도 이미 낮췄거나 더 낮출 것을 논의하고 있다. 주식 투자로 연간 5천만원 이상 버는 사람 등에게 내년부터 물리기로 한 금융투자소득세는 아예 폐지하겠다고 한다. 반면 과도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노조를 보호할 ‘노란봉투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노동자에게는 냉담하기만 하다. 세계에서 한국 노동자들이 가장 긴 시간 일하는 편인데, 주별로 근무시간을 대폭 늘릴 수 있는 개편안을 추진하려다 반발을 사기도 했다. 4·10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한 후 경제정책 기조가 바뀌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감세와 건전재정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방향은 불변이라고 한다.
언론은 이제 제대로 따져야 한다. 저출생 극복과 필수의료 확충, 과학기술 연구개발, 취약계층 지원을 위해 지출을 대폭 늘리겠다면서, ‘부자 세금 깎아주기’로 세수를 줄이는 게 말이 되는지. 그러면서 국가 부채도 안 늘리고 재정 건전성을 유지한다는 목표가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기후변화와 함께 급증할 재난 등에 대비하는 ‘적응’ 예산과 사양 산업의 노동자 등을 지원하는 ‘정의로운 전환’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눈앞에 닥친 지방소멸을 막을 교육·의료·문화·산업 인프라 확충은 무슨 돈으로 할 것인지. 기후위기·저출생·지방소멸의 복합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오히려 부자 증세를 시작으로 단계적 보편 증세를 추진하는 게 맞는 방향이 아닌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극심한 사회에서, 늑대가 아니라 양들의 자유를 위해 정부가 필요한 것이 아닌지.
한겨레는 부자 감세와 재정 긴축의 문제점을 꾸준히 지적하고 정책 기조 전환을 촉구해왔으나, 아쉽게도 ‘임팩트’(영향력)는 크지 않았다. 최근 국가재정전략회의를 다룬 기사에서도 ‘돈 쓸 곳 많은데 지출 구조조정만 꺼낸 정부’를 비판하고 ‘과세 기반 확충 필요’를 적절히 지적했으나, 지면과 온라인 기사 모두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좀 더 강력하고 집중력 있는 문제제기가 절실하다. 기사와 사설을 통해 조세·재정 정책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분석하고,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눈에 띄게 편집해 독자의 관심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자, 정책 담당자, 노사 대표 등을 모아 충분한 시간을 주고 토론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가. 합의점을 찾을 때까지 여러차례 거듭해서. 이를 유튜브 등으로 중계하고, 실시간 의견을 받아 쌍방향 소통하면 ‘내 삶과 정책의 관련성’을 더 많은 사람이 깨닫지 않을까. 공론장이 작동하면, 여론의 힘이 정책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강렬한 탐조등을 비추는 일에 언론이 분발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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