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진압군’ 구타로 얻은 장애…“다리 절고 폭도 낙인찍혀”
죽기 전 듣고 싶은 말…“아따 내가 잘못했소”
“그날 내가 광주를 안 나갔으믄, 내 인생도 지금보다는 잘 풀렸겄제?”
13일 광주 서구 치평동 자택에서 만난 홍순영(73)씨는 오른 다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44년이 흘렀지만 흉터가 여전했다. 계엄군의 구타로 얻은 장애는 흉터처럼 평생을 옭아맸다. 1980년 5월21일 오전 “광주에 큰일이 났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시위에 참여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 홍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홍씨는 당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으려고 인쇄소 일을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리를 절고 폭도 낙인까지 찍혔으니” 모든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5·18유공자이자 6·25전쟁 참전 희생자의 유족이다. 홍씨의 국가보훈등록증에는 ‘5·18민주유공자’라는 큰 글씨와 함께 작은 글씨로 ‘국가유공자 유족(전몰군경의 자녀)’이라고 적혀 있다.
전남 화순군 화순읍에 살던 홍씨 가족은 6·25전쟁 전까진 비교적 여유 있게 살았다. 홍씨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목포상업고등학교(현 목상고)를 졸업한 교사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의용소방대로 동원된 아버지는 1951년 초 숨졌다. 홍씨 어머니가 홍씨를 임신한 지 6개월 된 때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홍씨는 10살 때 또 한차례 비극을 맞았다. 농사와 장사로 생계를 꾸려가던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홍씨는 5살 위 누나의 보살핌으로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4남매 모두 힘든 삶이었다.
“평생 형과 누나한테 의지할 수 없으니까 제대로 된 직장을 얻을라고 광주 무등고시원을 다님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했제. 화순에 살았어도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왔고 내 집처럼 드나들었응게 5·18이 터지니 남의 동네 일이 아니더라고.”
1980년 5월 초파일(21일) 오전이었다. 선후배들이 광주로 가자고 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 동구 지원동에 도착했다. 버스기사는 광주 시내로 진입하지 못한다고 했다. 걸어서 옛 전남도청에 도착한 홍씨는 엄청난 인파를 목격했다. 홍씨는 시위대 차를 타고 전남대 정문에 도착했다. 홍씨는 낮 12시에서 오후 1시 사이로 기억했다.
“전남대 정문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군인들한테 쫓기고 있더라고. 나도 도망갔제. 갑자기 곤봉으로 뒤통수를 맞고 기절해부렀어.”
홍씨는 광주교도소에서 주변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끌려갔는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다리는 부러져 있었다. 계엄군들이 의식을 잃은 홍씨를 무참히 구타하는 과정에서 정강이뼈가 골절된 것이다.
홍씨는 이후 헬리콥터로 상무대 영창으로 옮겨졌다. 걸을 수가 없으니 바닥을 기어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제대로 몸을 가누덜 못헌께 남들보다 덜 맞았제. 그래서 그때는 다친 거시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어.”
계엄군은 홍씨의 죄가 크지 않다고 판단해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했다. 홍씨는 1980년 7월10일 ‘과오를 반성하고 차후 유사한 사례를 재발치 않겠다. 조국의 미래를 거머쥘 숭고한 소명을 자각하고 인내와 성실로 솔선수범함으로써 국가의 발전과 사회의 융성에 기여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퇴원과 함께 풀려났다.
홍씨는 이후 공무원이 되고자 했던 꿈을 접었다. 대신 화순군청 가까운 곳에 슈퍼마켓을 열었다. 몸이 성치 않으니 결혼은 남의 일이라고 여겼다. 30년 가까이 홀로 슈퍼를 운영하던 그는 2008년이 되어서야 가정을 꾸렸다. 같은 해 가게 문을 닫고 광주 서구 치평동에 아파트를 얻어 이사했다. 홍씨는 “지난해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다 표지석을 보고 옛 상무대 영창 자리였다는 사실을 16년 만에 알았다. 운명의 장난 같았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순탄치 않은 삶이었지만 홍씨는 “그래도 도청 앞에서 총 맞아 죽은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고 했다. 지난해 혈액암 판정을 받았음에도 “5·18유공자가 된 덕에 치료비를 감면받을 수 있으니 이것도 다행 아니냐”고 되물었다.
여생의 바람이 있다면 소소하다. 가해자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는 것이다.
“5·18조사위원회? 거기서 군인하고 경찰들도 피해자로 조사했다고 하대. 그 소릴 들응게 기가 맥혀 불드만. 내가 바라는 거? 별 거 아니여. 내 다리 이렇게 만든 군인한테 ‘아따, 내가 잘못했소’ 사과 한마디 듣는 거. 그거시 가능할까 모르겄어.”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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