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 선거’부터 직선까지 굴곡의 역대 대만 총통

구자룡 기자 2024. 5. 2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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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부자 간선, 종신 집권 이어 1996년 직선제
‘하나의 중국 원칙 92 공식’ 준수 여부로 양안 관계 요동
[타이베이=AP/뉴시스] 20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라이칭더 총통 취임식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대형 화면을 통해 라이 총통의 연설을 듣고 있다. 2024.05.20

[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20일 취임하는 민진당의 라이칭더 총통은 16대다.

대만에서 1996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직선으로는 다섯 번째 총통이다.

장제스 부자, 국민당 일당 집권하의 ‘체육관 선거’로 당선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건너오기 전인 1948년 5월 대륙에서 임기 6년의 초대 총통에 당선됐다.

당시는 지역 직능 해외화교 소수민족 여성단체 대표 등 2963명으로 구성된 국민대회에서 간선으로 뽑았다. 이중 대만섬(대만성) 대표는 19명이었다.

그가 1949년 내전에서 패퇴해 대만으로 옮긴 이른바 ‘국부천대(國府遷臺)’ 때 국민대회 대표 중 절반 가량만이 대만으로 넘어왔다.

그런데 1954년 2차 총통을 선출할 때부터 1996년 직선제로 바뀔 때까지 초대 국민대회 대표가 ‘종신대표’처럼 간선으로 총통을 뽑았다. 대표가 사망해도 보충하지 않았다.

장제스, 장징궈 부자와 리덩후이 1기 총통도 이렇게 선출했다. 38년간 계엄이 지속되고 국민당의 일당 집권체제하에서 이뤄진 ‘대만판 체육관 선거’의 독특한 최고 지도자 선출이었다.

대륙에서 공산당에 쫓겨와 철저한 반공 정책을 폈으나 장징궈 총통 후반기에는 누그러졌다.

국민대회는 직선제 도입 후 가장 중요한 기능인 총통 선출 기능은 없어진 뒤 2005년 기능이 중지됐다.


대만 계엄령 : 1949년 5월 〜 1987년 7월 (38년)
민진당 창당 : 1986년 9월
첫 직선제 총통 선거 : 1996년

시대 변화를 수용한 장제스 장남 장징궈와 ‘두 개의 중국’ 리덩후이 총통

장징궈 총통은 부친인 장제스 전 총통의 ‘무력을 통한 대륙 수복’이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을 인정하고 대륙과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이었다는 평가다.

경제 발전에 따른 대만 사회의 변화와 성장에 따른 민주화 요구, 미국의 압력,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의 민주화 물결 등의 영향으로 38년간 지속된 계엄을 해제하고, 민주진보당(민진당) 창당을 허용하는등 민주화 조치를 취했다.

첫 대만 출신 총통이었던 리덩후이는 1990년 첫 번째 직선 총통 선거에 출마해 ‘두 개의 중국론’을 내세우자 중국측은 선거 전 대만해협에 미사일을 발사하며 무력 행사를 했다. 하지만 중국의 ‘북풍’은 오히려 리 총통의 지지를 높이는 역작용을 낳았다.

대만 총통 선거 대륙 발 ‘북풍’ 논란 지속

직선제 이후 역대 대만 총통에서 중국의 개입은 줄곧 논란이었다.

올해 선거에서도 중국의 ‘문공무협(文攻武嚇)’이 화두였다. 문은 선전 여론전 통일전선전술 등을 지칭하고 무는 무력시위로 투표에 영향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통 선거를 4일 앞둔 1월 9일 중국은 대만 상공을 지나는 위성을 발사했고, 대만 당국은 경보를 발령했다.

차이잉원 전 총통은 2020년 재선을 앞두고 국내 지지율 하락으로 국민당 주석에서 물러나는 등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2019년 홍콩의 민주화 시위와 중국의 ‘일국 양제(一國兩制· 1국가 2체제)’를 부인하는 듯한 강경 대응이 대만에도 대중 공포감을 확산시켜 차이 총통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부패로 몰락한 천수이볜, ‘제3 국공 합작’ 마잉주

가난한 농부의 아들 천수이볜은 대만 역사상 첫 정권 교체의 업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자금세탁 등 부패 비리 스캔들로 2009년 9월 1심에서 종신형을 받았다가 후에 감형된뒤 2015년 1월 가석방됐다.

그는 자신에 대한 재판이 정치적 보복이라고 주장했고, 수감 중 펴낸 책 ‘1.86평’은 그가 갇혔던 타이베이 교도소 감방의 크기를 나타낸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마잉주 전 총통은 두 차례 재임 중 대륙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이른바 소삼통(小三通·통항 교역 우편), 대삼통(大三通·통항 통상 통신) 등의 문을 활짝 열었다.

2011년 양안(중국 대륙과 대만)간 자유무역 협정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도 2011년 발효됐다.

마 전 총통은 두 번째 퇴임을 앞둔 2015년 11월 싱가포르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나 ‘제 3차 국공합작’을 이뤘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옮겨온 뒤 대만 총통이 중국 최고 지도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마 전 총통은 지난해 3월 전 대만 총통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대륙을 방문하는 등 양안 관계 개선을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양안 관계의 핵심 키워드 ‘92공식(共識)

중국과 대만은 리덩후이 총통 시절인 1992년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되(一個中國), 그 표현은 양안 각자의 편의대로 한다(各自表述)’는 이른바 일중각표(一中各表) 양안관계 원칙에 합의했다.

2015년 시 주석과 마 전 총통의 회담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확인된 것처럼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여긴다.

하지만 역대 민진당 출신 총통들은 이 원칙 준수에 대한 입장을 모호하게 하거나 거부하는 등의 말과 정책으로 중국과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화 이후 5명 총통은 국립대만대 동문


민주화 이후 당선된 리덩후이, 천수이볜, 마잉주, 차이잉원, 라이칭더 5명의 총통 모두 국립대만대 출신이다. 리덩후이(농업경제학과)와 라이칭더(의학원) 외 3명은 법학과 선후배들이다.

라이 총통은 차이잉원에 있어 당선돼 민진당과 국민당이 8년씩 교대로 집권하던 관례가 깨졌다.

총통 임기는 4년이며 중임할 수 있다.

대만 총통 선거는 ‘부재자 투표’가 없다. 직접 참가해야 한다. 2008년 마잉주 총통이 당선될 때 대륙에 나가 있던 유권자들이 친중 성향의 마 후보에 투표하기 위해 대만행 봇물을 이뤄 세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모든 표를 수개표하는 것이 널리 알려져 화제가 됐다.

☞공감언론 뉴시스 kjdrag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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