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버리고 29살 연하와 밀애…1000억대 ‘전성기 작품’ 수두룩

2024. 5. 2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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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주의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화려한 명성 뒤 수많은 염문으로 유명
첫 아내 코클로바·전성기 함께한 윌터
끝나지 않는 여성편력이 작품으로 탄생
영감의 순간 끝나면 일방적 이별 반복
뮤즈들, 수천억 초상만으로 기억될 뿐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한 작품이 명성을 얻게 되는 데는 작품성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컬렉터나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론 스캔들, 법적 분쟁, 도난 사건, 심지어 예술계를 뒤흔든 저항까지….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평판 높은 이런 미술품들은 단 0.1초 차이로 행방이 갈라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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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가 1950년 8월 국제 청소년 평화 집회에 참석한 독일 대표단 소녀들의 기념품에 사인해 주고 있다.

“할아버지의 걸작은 가족들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손녀인 마리아 피카소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로 꼽히는 입체주의 미술의 거장, 피카소. 그러나 그의 파란만장한 여성편력은 화려한 명성 뒤에 가려진 어두운 그늘인데요. 미술사를 통틀어 피카소만큼 수많은 염문을 뿌린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수많은 뮤즈 사이에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완성한 화가의 대명사를 꼽자면, 단연 피카소입니다.

페르낭드 올리비에(23세), 에바 구엘(26세), 올가 코클로바(26세), 마리 테레즈 윌터(17세), 도라 마르(29세), 프랑수아즈 질로(21세), 재클린 로크(27세)....

92세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피카소와 사랑을 나눈 연인들의 이름과 처음 만났을 때 이들의 나이입니다. 이마저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경우만 해당합니다. 비공식적인 연인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납니다. 피카소는 이 중 두 명과 결혼했고, 아내가 있었음에도 외도를 일삼았고, 사창가를 전전하면서 수많은 여자와 어울렸습니다.

파블로 피카소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올가 코클로바[Fine Art Images·Heritage Images]

오늘날 경매 판매 1위...1000억 넘는 그림 수두룩

수많은 여자와 함께 산 그를 거장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날 미술품 경매에서 작품이 가장 많이 판매된 ‘1위 작가’가 바로 피카소이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미술시장 분석회사인 아트프라이스에 따르면, 피카소의 작품은 공개 경매(지난해 기준)에서만 무려 8만7369번 판매됐습니다. 그러니까 불륜을 저지르고, 혼외자식은 물론 친자식까지 내팽개치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여성을 곁에 두고, 그러다 ‘영감의 순간’이 끝나면 일방적으로 뮤즈를 버리고 떠난 피카소의 수많은 그림들이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건데요.

실제로 피카소는 새로운 여성과 사랑에 빠질 때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소설가 카멜 다우드의 표현대로, 피카소는 ‘여자를 삼킨 화가’였던 것이죠. 피카소의 작품 중 1억달러 이상, 그러니까 원화로는 1000억원이 훌쩍 넘는 최고가 작품만 무려 6점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4점에서 피카소의 절대적 뮤즈가 등장합니다. 여인은 바로 마흔여섯의 피카소가 만난 마리 테레즈 윌터.

당시 윌터의 나이는 열일곱이었습니다. 피카소는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인 올가 코클로바와 혼인 관계였지만,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이제 막 지하철역 계단에서 걸어 나오는 윌터와 첫눈에 사랑에 빠졌죠. 29살의 나이 차이는 피카소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난데없이 윌터의 팔목을 잡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말입니다. “윌터를 만난 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이전에 늘 바라고 꿈꾸던 것을 갖게 됐다는 것을....”

여자 바뀔 때마다 화풍도 업그레이드

그때만 해도 ‘땡전’ 한 푼 없었던 피카소가 저명한 미술품 수집가인 레오·거트루드 스타인 남매의 지원으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작업 활동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의 막강한 후원을 등에 업은 피카소는 음울하고 어두운 ‘청색 시대’ 화풍을 벗어나 붉은색, 오렌지색, 핑크색 등 밝은 톤이 특징인 ‘장미 시대’를 지나가고 있었죠. 그의 아내인 코클로바와 연애가 가져온 그의 대대적인 스타일 변화였습니다.

이어 그는 본격적인 현대미술의 출발을 알리는 ‘큐비즘’에 당도해 독창적인 기법을 구현해 내게 됩니다. 큐비즘이란 한 화면에 두 개 이상의 시점이 동시에 들어간 입방체주의를 말하는데요. 500년 묵은 원근법에서 그림을 해방시킨 폴 세잔(1839~1906)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피카소는 회화의 형태, 그 자체를 완전히 벗어납니다.

예컨대 하나의 화면 안에 얼굴의 정면과 측면, 또는 배면을 함께 그린 겁니다. 입체파가 현대로 나아가는 시대의 길목에서, 그렇게 피카소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듭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이 과연 그대로 실재하는 것인지, 시대의 질문을 던지거든요.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대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달리 말하면 우리가 그 대상을 보는 방식을 화면에 펼쳐보이고 있는데요.

파블로 피카소의 ‘황금 뮤즈’로 불리는 마리 테레즈 윌터 [Apic]

특히 명문 집안의 딸인 아내 코클로바의 사교력으로 러시아 상류층과 교류한 피카소는 그들이 좋아할 법한 그림도 대량으로 그려내면서 막대한 돈까지 벌기에 이릅니다. 이는 이른 나이에 돈 걱정 없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는데 매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피카소는 우연히 마주친 윌터와 광적이다시피 한 성애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아내 코클로바를 헌신짝 버리듯 미안하다는 얘기도 없이 떠났습니다(엄밀히 말하면 피카소는 아내에게 외도 사실을 숨기며 윌터와 비밀스러운 내연관계를 지속했죠). 뒤늦게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코클로바는 피카소와 이혼을 강력하게 원했지만, 그는 이혼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돈 때문이었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코클로바에게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바람은 피웠지만, 이혼은 못 해주겠다는 건데요. 그래서 코클로바는 남편이 외도로 혼외자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도, 알코올 중독자가 돼 끝내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피카소와 법적으로 부부여야만 했습니다. 둘의 관계는 완전히 파국으로 치달았지만 코클로바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29살 연하와 불륜...전성기 작품을 남기다

그렇게 코클로바는 피카소의 예술세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대신 에로틱한 뮤즈인 윌터가 전면 등장하죠. 윌터와 연애를 통해 피카소의 표현 기법은 또 한 번 업그레이드됩니다. 피카소와 윌터가 사귄 1920년 중반에서 1930년 중반까지 8년. 당시 피카소의 나이, 4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까지인데요. 피카소 생애 통틀어 그의 창작열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꼽히는 초현실주의 시기가 이때 도래하거든요.

피카소의 ‘황금 뮤즈(Golden Muse)’로 꼽히는 윌터는 매일같이 피카소의 작업실에 방문해 그의 모델이 됐습니다. 그의 여인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인기와 작품 값을 자랑하는 그림들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나는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평생 동안 나는 사랑만 했다. 사랑 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다.”

특히 1930년부터 피카소는 노르망디 지역 부아젤루성(城)을 새로운 작업실로 사용했는데요. 윌터를 모델로 그린 작품만 무려 100점이 넘습니다. 드로잉·유화·판화·조각 작업까지 했으니 말 다 했죠. 이 시기 피카소는 경쟁자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던 앙리 마티스(1869~1954)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관을 공고하게 구축합니다. 마티스가 색에서 벗어났다면, 피카소는 형태를 해방시킨 겁니다. 바야흐로 피카소의 전성기가 온 것이죠(특히 피카소는 형태 위주의 긴장과 정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는 마티스가 안정과 조화를 추구한 것과도 대비됩니다).

명성답게 이 시기 피카소의 작품들이 실제로 높은 낙찰가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자, 작품을 차례로 볼까요.

우선 지난해 11월 피카소의 1932년작 ‘시계를 찬 여인(Femme a la Montre)’은 1억3930만달러(약 1820억원)에 판매됐습니다. 이는 지난해 통틀어 전 세계 경매시장에서 가장 최고가에 팔린 그림입니다. 화면 속 여성은 시계를 찬 윌터인데요. 무엇보다 이 그림이 특별했던 것은 피카소가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불륜 사실을 세상에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뉴욕에서 경매회사 소더비 직원이 파블로 피카소의 ‘시계를 찬 여인’(1932년)의 응찰 가격을 받고 있는 모습 [AFP]

다음으로 피카소가 1932년에 그린 ‘꿈(The Dream)’은 어떨까요. 이 그림은 2013년 1억5000만달러(약 1720억원)에 판매됐습니다. 화면에는 안락의자에 앉아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깊은 잠에 빠진 관능적인 모습의 윌터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윌터의 얼굴에는 피카소의 발기된 남근을 추상적으로 묘사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죠.

피카소의 ‘꿈’(1932년) [Steven A. Cohen 개인 소장]

또 피카소의 1932년작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Nude, Green Leaves and Bust)’은 2010년 1억650만달러(약 1188억원)에 판매된 작품입니다. 윌터가 옷을 벗은 채 누워 있는 모습입니다. 피카소가 단 하루 만에 그린 그림이자,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갱신한 것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고요.

파블로 피카소의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1932년) [개인 소장·테이트모던 대여]

마지막으로 2021년에는 피카소의 1932년작 ‘창가에 앉아있는 여인(Woman Sitting Near a Window)’은 1억340만달러(약 1168억원)에 판매됐는데요. 한 손을 어깨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을 무릎에 살포시 얹은 채 창 밖을 바라보는 윌터에게서 청순함이 느껴지시나요. 다른 작품과 달리 성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연인이 아닌 순수한 이미지의 윌터가 그려졌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경매장에 출품된 피카소의 ‘창가에 앉아있는 여인’(1932년)

이 즈음 되면 눈치를 챈 독자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들이 완성된 연도가 눈에 띄진 않으신지요. 네, 모두가 1932년. 피카소의 나이 쉰하나. 그리고 윌터의 나이는 스물둘. ‘나 피카소 좀 안다’ 하려면 꼭 기억해야 하는 연도입니다. 피카소가 윌터를 만나면서 그의 작품 인생의 절정으로 도약한 결정적인 해거든요. 2018년 영국 테이트 모던 박물관이 피카소의 1932년 작품만을 한데 모아 ‘PICASSO 1932’ 전시를 열었을 정도죠.

“예술이란 우리가 진실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거짓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너무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작업 결과, 그러니까 자신의 작품이 그 자체로 진실이라고 믿는다. ‘진실’이란 캔버스 저 너머에서 형상화되는 것이다. 결코 캔버스 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진실은 캔버스와 현실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여성편력, 그리고...

피카소의 최고 하이라이트 그림들이 완성되고 2년이 지난 1935년, 윌터와 피카소 사이에서 딸 마야가 태어납니다. 그러나 불과 이듬해인 1936년께 이 둘의 은밀한 관계에도 일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피카소가 초현실주의 사진가인 26살 연하의 도라 마르와 급속도로 가까워지거든요. 마르는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게르니카’를 그리던 중에 만난 여성이었습니다(이건희 컬렉션에도 마르의 초상화가 있죠).

피카소는 윌터와 마르, 모두와 관계를 지속했습니다. 둘 중 한 명을 고르라는 연인들의 요구에 피카소는 “내가 선택할 순 없으니, 둘이 알아서 해결하라”고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피카소는 걷잡을 수 없이 마르에게 빠져들었고, 결국 윌터를 그의 세계에서 지워버립니다.

그렇게 마르는 10여 년간 피카소의 예술세계에 새로운 뮤즈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이후에도 피카소의 여성편력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프랑수아즈 질로에 한눈에 반해 쩔쩔맸고, 이어 첫 아내인 코클로바의 죽음과 함께 두 번째 부인으로 재클린 로크를 맞이합니다).

자신을 떠난 피카소를 한평생 그리워하며 기다림 속에서 살았던 윌터. 그는 피카소 사망한 지 4년 뒤인 1977년 자신의 집 차고에서 목을 매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와 함께 있어줘야 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피카소는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으로 기록됐고, 윌터는 위대한 화가의 뮤즈였던 옛 영광만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그렇게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졌습니다. 가격만 무려 1000억원이 웃도는 그의 초상만이 세상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을 뿐이죠.

이정아 기자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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