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배경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차마’ 그 마음으로, 환자 곁 지킨 의사들 [매경데스크]
지난 2003년 3월 9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한국외대 대학원 강당에는 ‘임시 진료소’가 차려졌다. 50여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행색이 초라했고 눈빛은 불안했다. 이 젊은이들은 당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의 20대 수배자들이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7년 넘게 숨어다녀야 했기에 건강 문제가 심각했다. 이를 전해들은 몇몇 의사들이 나서서 임시 진료소를 차리고 치료에 나섰다.
이날 경찰은 한국외대 주변에 100여명의 경력을 배치했지만 수배자들이 교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도, 연행하지도 않았다. 비록 수배자들이었지만 ‘환자와 의사’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다 정작 본인은 건강을 잃어 지난 2015년 세상을 떠난 배기영은 생전에 “왜 아버지는 맨날 다른 사람을 돌보러만 다니냐”는 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빠 이름 ‘배기영’을 빨리 발음해보면 ‘배경’이 돼. 아빠는 세상의 배경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랬다. 배기영은 늘 환자 곁에 있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 배경 같은 의사였다.
차승민은 국립법무병원, 보통 치료감호소로 불리는 곳에서 일하는 정신과 의사다. 그러니까 그가 진료하는 환자들은 모두 범죄자들이다. 그의 환자 중에는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살인범 김성수같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들도 있다. 치료감호소에서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의 무섭고 애처로운 환자들’에서 차승민은 “치료가 우선이다. 자신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난 다음에야 참회와 반성, 처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범죄자들을 왜 국가가 돈을 들여 치료를 해주느냐”는 비판을 종종 듣지만 차승민에게는 그저 한명의 환자일 뿐이고 환자이기에 의사로서 치료할 뿐이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면서 시작된 의료대란이 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환자들의 수술이 미뤄지고 대학병원에 적자가 쌓이는 등 점점 한계상황을 향해 가고 있지만 진료 중단 사태는 발생하지 않고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병원이 이렇게라도 유지가 되는 것은 사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긴급 지원 때문도 아니고 환자들이 알아서 병원을 찾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비록 정부 정책에 반대를 하지만 차마 환자를 외면할 수 없는 의사들이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전국 51개 대학병원의 교수들이 명목상 ‘집단 휴진일’로 선언했지만 이날도 사실상 대부분의 의대 교수들은 진료실을 지켰다. 의대 증원에 반발해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이미 진료 예약이 된 환자들과 수술이 잡혀있는 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충남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누구보다 의료 교육 현장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으로 2000명 증원은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지만 그래도 차마 환자들을 떠날 수 없어 병원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법원이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가처분 항고심에서 각하와 기각 결정을 하면서 의료계가 올 입시에서 의대 증원을 막을 방법은 없어졌다. 사직과 휴진을 고집한다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의사들만 더욱 고립될 뿐이다. 의사들은 환자 곁으로 돌아오고 의사 단체는 정부와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방법 밖에 없다. 올 입시는 이렇게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후년 정원은 논의를 통해 조정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물론 정부도 의사들이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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