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수의 골프 오디세이 <180> JLPGA 투어 최연소 우승 기록 세운 이효송과 할아버지 이야기] 일본 열도를 놀라게 한 한국 여고생의 ‘강심장 골프’
여고 1학년 아마추어 국가대표 이효송(마산 제일여고)이 5월 5일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메이저 대회 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 살롱파스컵 정상에 올랐다. 마지막 날 7타 차를 뒤집는 극적인 대역전승이었다. JLPGA 투어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15세 176일)도 세웠다.
강풍이 부는 가운데 마지막 두 홀에서 “우승 아니면 의미 없다”며 홀을 향해 직진한 강심장 승부사의 등장이었다. 17번 홀(파3) 버디와 18번 홀(파5) 이글로 3타를 줄이며 불가능할 것 같던 우승컵을 낚아챘다.
박세리(47)의 1998년 US오픈 ‘맨발 투혼’ 이후 세계를 호령하던 한국 여자 골프의 원동력은 척박한 골프 환경의 국내를 떠나 미국과 일본 무대를 향한 도전 정신이었다. 그 과정에서 딸의 골프 코치부터 로드 매니저, 운전기사까지 도맡아 하는 한국의 골프 대디(Daddy·아버지)도 유명세를 탔다.
기 센 할아버지와 황소고집 손녀딸 이야기
이효송과 그의 할아버지는 독특하게 골프 그랜파(Grandpa)란 신조어를 만들어낼 기세다. 이효송의 할아버지 이승배(69)씨는 생계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손녀딸과 동고동락하며 한국의 새로운 골프 여왕 재목을 키워냈다. 기가 대단히 센 할아버지와 수줍음 잘 타지만 황소고집을 지닌 손녀딸의 이야기다.
먼저 이효송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제 장점을 꼽으라면 정신력과 인내심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주변에서 안 좋은 말을 해도 꿋꿋이 해요. 어릴 때는 소심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워낙 세셔서 같이 지내다 보니까 저도 같이 세진 것 같아요. 초등학교 졸업반 때 경상남도 도 대회에 나간 적이 있어요. 첫날 1등을 하다 마지막 날 못 쳐서 3등으로 마쳤어요. 충분히 1등 할 수 있는데 3등 했다고 할아버지가 화가 나셨어요. 과수원 밭을 밀어내고 그린과 벙커, 어프로치 연습장을 만들어 놓은 집에 있을 때였어요. 할아버지가 들어오지 말고 나가서 연습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밤 8시인데 마산 근처 시골이다 보니 가로등도 없고 깜깜했어요. 마당에 가로등 하나 있는데 불도 못 켜게 하셨어요. 불 끄고 서예 연습했다는 한석봉 이야기와 비슷해요. 저도 지기 싫어서, 항복하기 싫어서 롱패딩 입고 플래시로 홀을 비추고 퍼팅 연습을 했어요. 밤이고 시골이니까 무서움을 달래려고 휴대전화로 노래를 틀어놓았어요. 두 시간 정도 그렇게 하니까 가족들이 뜯어말려서 그제야 방에 들어간 일도 있었어요.”
그런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골프 연습장에 가면 효송이가 늘 따라다녔어요. 초등학교 3학년인가부터는 내 옆에서 나무로 만든 클럽을 들고 골프 치는 흉내를 내고 그랬어요. 그러다 ‘할아버지 저도 골프하고 싶어요’ 하는 거예요. 운동하면 힘들 것 같아서 자꾸 조건을 달았어요. 그렇게 100번은 다짐을 받은 것 같아요. 학교에서 공부로 1등을 하면 시켜줄 거라고 하면 몇 번이고 1등을 해왔어요. 효송이가 아이큐(IQ) 138이에요. 머리도 좋아요. 그래서 정식 골프 대회에서 10등 안에 들면 그때는 정식으로 시켜 줄게 하니까 3학년때 초등연맹 대회에서 10등을 해서 오는 거예요. 약속을 모두 지키는 걸 보고 시켜도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4학년부터는 내가 골프 훈련도 시키고 대회도 데리고 다니고 그랬어요. 7년을 따라다녔는데 효송이가 일본 메이저 프로 대회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보네요. 어린이날에 거꾸로 효송이가 내게 가장 큰 선물을 주었어요. 정말 기쁩니다. 어릴 때 혼은 내도 마음으로야 엄청나게 좋지요. 손녀니까. 인성 공부를 시키려고 하니까 내가 웃음을 주면 안 되겠더라고요. 크면 할아버지 마음을 알 거다 하는 생각으로 엄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균형 뛰어나고 승부사 기질 가지고 있어"
162㎝의 크지 않은 체구지만 270야드 장타를 펑펑 날리는 과감한 경기 스타일. 하지만 혼자 있기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의 반전 매력 보유.
이런 이효송 이야기는 일본 언론에도 대서특필됐다. 일본 소바를 좋아하고 일본 만화를 보면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이효송은 “그렇게 많은 기자 앞에서 인터뷰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한 시간은 훌쩍 넘었고 두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던 것 같아요. 골프 안 할 땐 집에서 쉬는 걸 좋아한다고 답하면, 그러면 무얼 하면서 쉬느냐고 묻는 식이었어요. 꼬치꼬치 끝없이 물어보시더라고요”라고 했다. “1년 전부터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그는 정작 우승하고는 시간이 없어 맛집은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계기도 이 대회였다. 이효송은 중학교 2학년이던 2022년 강민구배 한국 여자 아마추어 골프선수권에서 우승해 2023년 이 대회 초청을 받았다. “처음 큰 일본 프로 대회에 나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컷 탈락했어요. 너무 아쉬웠어요.”
2023 강민구배 한국 여자 아마추어 골프선수권에서 2연패하며 올해 다시 기회를 잡았다. “이번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틀 만에 집에 가는 일은 말자고 다짐했지만, 첫날 3오버파 공동 71위로 출발하고 말았죠”라고 했다.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공격적인 경기로 2라운드와 3라운드에서 각각 3언더파를 치며 공동 10위(3언더파)로 뛰어올랐고 강풍이 몰아친 마지막 날 5타를 줄이며 승부를 뒤집었다.
이효송은 이미 세계 아마추어 골프계에서 한국 차세대 간판으로 이름을 알린 유망주다. 지난해 김민솔(18), 서교림(18)과 함께 세계 여자 아마추어 팀선수권 우승을 차지했고, 올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고 권위 대회 퀸 시리키트 컵에서도 김시현(18), 오수민(16)과 호흡을 맞춰 정상에 올랐다. 지난해 6월 강민구배 한국 여자 아마추어 골프선수권에서는 최종 라운드에 버디 10개를 잡아내며 2연패를 차지했다. 당시 한 라운드 최소타와 대회 최소타 기록을 모두 새로 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전국 대회 우승을 차지한 이후 개인전 우승 트로피만 43개. 할아버지 이승배씨는 손녀가 초등학생 때 훈련할 곳이 마땅치 않자, 밭으로 쓰던 집 앞마당을 미니 골프장으로 만들어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린뿐 아니라 벙커까지 갖춰 이효송은 쇼트 게임과 퍼팅을 일찍부터 다듬을 수 있었다.
놀라운 샷 정확성과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도 장점이다. 평소 “똑바로 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다”는 자신감이 돋보인다. 코치를맡은 이시우 빅피쉬 골프아카데미 원장은 “같은 샷을 반복해서 칠 수 있는 균형이 뛰어나고 놀라운 승부사 기질을 지녔다”고 말했다. 이효송은 “박인비 언니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모습을 보며 골프의 꿈을 키웠기 때문에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다”면서 “공이 홀 컵에 들어가는 순간이 제일 좋다”고 했다.
국내 투어에 안주하고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주춤하던 한국 여자 골프의 흐름에 이효송이 강력한 반전 활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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