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년의 힘’으로 AI시대 인재육성… 혁신 빅 픽처 그리는 담대한 공학자[Leadership]
재료공학·나노융합기술 전문가
작년 ‘유학 상징’ 학교 수장 취임
반도체융합·에너지학과 신설
첨단분야 연구중심대학 지향
전국대학 유일 ‘반도체 트레블’
부·차장 등 권위적 호칭 없애고
선임·책임·수석 3단계 단순화
“유지범 교수는 ‘담대한 혁신가’다. 큰 그림을 보고 담대하게 나아간다.”
지난 10년 동안 유지범 성균관대 총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봐왔던 유필진 성균관대 기획조정처장(화학공학·고분자공학부 교수)의 평가다. 혁신가라 하면 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성균관대 수장의 이미지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언뜻 든다. 우리나라 대학 중 전통 계승을 가장 중시하는 학교가 성균관대여서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매년 입학식과 졸업식 때 성균관 문묘 대성전 앞에서 고유례를 지낸다. 공자의 신위를 모시는 대성전에 향을 올리고 축문을 고하는 행사다. 외국인 유학생들까지 옛 성균관 유생 복장인 ‘청금복’을 입고 예를 갖추는 모습은 입학 철마다 국내외 언론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난해 1월 22대 총장으로 취임한 유 총장 역시 붉은 관복을 입고 고유례를 치렀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계승하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게 끊임없는 혁신이기도 하다. 영국의 정치가·사상가였던 에드먼드 버크도 “변화의 수단이 없는 국가는 보존할 수단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총장 취임 1년 만에 ‘빅 픽처를 그리는 담대한 리더’라는 평가가 나오는 유 총장의 행보가 주목받는 이유다. 유 총장 앞에 놓인 과제들은 적지 않다. 당장 세계대학평가에서 순위를 끌어올려 100위 안으로 재진입하는 숙제가 남았다. 챗GPT 등 인공지능(AI) 발달로 급변하는 현실에 맞춰 교육의 틀도 새로 짜야 한다. “큰 목표를 향한 담대한 혁신”을 외치는 유 총장이 그려나갈 성균관대 미래 청사진에 학교 안팎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626년 전통 잇는 ‘이공계 총장’ = 20일 대학가에 따르면 성균관대는 그 기원을 서울 동북방 숭교방에 성균관이 설립된 조선 태조 7년(1398년)으로 잡는다. 무려 626년에 이르는 긴 역사다. 그런 성균관대를 이끄는 유 총장이 첨단기술 선두에 선 공학자인 것부터가 이채롭다.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재료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성균관대에 부임한 유 총장은 전자 이동 속도가 실리콘 반도체보다 10배 이상 빨라 ‘꿈의 신소재’라 불린 그래핀의 대량 양산 기술을 개발, 세계적 학술지 ‘어드밴스트 머티리얼스’ 2009년 7월호에 관련 논문을 게재해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그 밖에도 ‘나노융합2030’ 사업 기획에 참여해 나노융합산업 생태계의 저변 확대에 이바지했고, 한국 나노기술의 국제표준화에도 적극 나서 왔다.
유 총장이 목표로 하는 미래 성균관대의 모습 역시 첨단분야를 선도하는 연구중심 대학이다. 성균관대는 올해 학부에 반도체융합공학과·에너지학과(112명)를, 대학원에 실감미디어공학과·반도체융합공학과·메타바이오헬스학과·미래에너지공학과·지능형로봇학과(251명)를 신설했다. 질적 연구성과 중심의 교원 인사제도 개편, 학과 성과보상 제도 신설 등 ‘임팩트’ 있는 연구 성과가 신산업으로 연결되는 제도적 혁신도 시행했다. 또 삼성전자와 함께 5년제 학·석사 통합 과정으로 채용연계형 계약학과인 ‘지능형소프트웨어학과’를 새로 만들어, AI 특화 인재를 양성하기로 했다. 재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응용AI융합학부에선 디지털 기반 인재를 양성한다.
전국 대학에서 유일하게 ‘반도체 트레블’을 달성한 대학이란 점도 성균관대의 자랑거리다. 성균관대는 반도체 분야 정부재정지원사업인 반도체특성화대학원(산업통상자원부), 첨단분야 혁신융합대학 반도체 소부장 주관대학(교육부), 반도체특성화대학 지원사업(교육부)에 선정돼 지난해 정부재정지원사업 3개를 모두 따냈다.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을 주제로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 주재의 민생 토론회가 열렸던 곳도 경기 수원의 성균관대 반도체관이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성균관대를 직접 ‘반도체 인재의 산실’이라고 부르며 전국 단위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대학사회에도 수평적 조직문화 = 유 총장의 혁신 DNA는 연구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학사회의 조직 문화부터 바꿔야 혁신의 토양도 일굴 수 있다는 게 유 총장의 소신이다. 변화는 이미 직원들이 서로를 부르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됐다. 유 총장 부임 후 성균관대는 직원 전체의 호칭을 선임·책임·수석의 3단계로 나누기로 했다. 기존에는 직원·주임·계장·과장·차장·부장의 6단계였는데 3단계로 절반을 줄이고, 호칭 자체도 권위적인 느낌의 ‘장’에서 담당 업무와 권한 중심으로 바뀌었다. 전통적 위계질서에서 탈피해 서열을 완화하고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기존 호칭에서 경직된 상하관계가 느껴졌다면, 새로운 호칭은 보다 수평적인 느낌을 주고 직원 개개인의 권한과 책임이 분명해졌다는 평가다. 이미 기업체 등에서 상당히 도입된 조치지만, 상대적으로 변화의 속도가 더딘 대학사회에선 흔치 않은 움직임이다.
◇디지털 시대 교육혁신은 도전과제 = 올해 ‘2년 차 총장’이 된 유 총장이 해결해야 할 숙제도 적잖다. 무엇보다 세계대학평가 순위를 100위권 안으로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영국의 대학평가 기관 QS가 발표한 2024 세계대학평가에서 성균관대의 순위는 145위에 그쳤다. 2021년엔 88위로 최고 순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올해는 국내 대학들의 전반적 약세 속에 성균관대도 100위 안에서 밀려났다. 또 다른 영국의 평가 기관인 타임스고등교육(THE)이 발표한 순위에서도 성균관대는 145위를 점했다. 2019년 기준 82위까지 올라섰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아쉬움이 남는 순위다. 성균관대는 질적 연구 역량 제고, 최우수 교원 채용, 교원 인사제도 개편, 국제 공동연구 강화 등을 적극 추진하며 반등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세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바뀌고 있는 교육 환경은 또 다른 도전이다. 성균관대는 전공 교육과정을 개편해 디지털 시대에 맞는 교육방식으로 탈바꿈하는 교육혁신전략 ‘BIGs’를 추진하고 있다. 학생은 강의 전에 미리 온라인으로 이론을 습득하고,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강의실에선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 대신 토론·탐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수업을 하겠다는 게 디지털 교육 모델 혁신의 골자다. 전공 이수 학점을 하향 조정해 전공 간 벽도 낮췄다. 학생들은 복수전공·융합트랙·마이크로디그리(소전공) 등을 통해 여러 학문을 경험하게 된다. 성균관대 관계자는 “학문 영역 간 벽을 허물고 유연한 학사제도의 확대를 통해 모집단위를 다양화해 다학제 기반 융합인재를 양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유 총장은…
△1959년 인천 △서울대 금속공학과 학·석사 △미국 스탠퍼드대 재료공학 박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성균관대 공학교육혁신센터장 △성균나노과학기술원 부원장 △성균관대 공과대학장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부총장 겸 산학협력단장 △한국연구재단 국책연구본부장
퇴계 등 ‘대사성’ 조선시대 유학교육 책임… 독립운동가 김창숙, 해방 후 초대 총장
■ 역대 성균관대 수장은
성균관대가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을 계승한 만큼, 성균관대 총장의 기원 역시 조선 성균관의 기관장이었던 대사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3품 당상관이던 대사성은 품계가 6조 판서보다는 낮았지만, 한 나라의 유학 교육을 책임지고 관료를 배출하는 만큼 명예로운 위치였다. 퇴계 이황이 고봉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변’을 벌일 때 퇴계의 벼슬이 바로 대사성이었다.
20일 성균관대에 따르면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고등교육기관의 기능을 회복한 성균관대의 첫 총장을 맡은 이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었다. 1945년 11월 성균관 명륜당에서 열린 전국유림대회에서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됐고, 명륜전문학교와 학린사 등을 통합해 재단법인 성균관대가 설립됐다.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 김창숙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외를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벌인 유림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지금도 서울의 인문사회과학캠퍼스와 수원의 자연과학캠퍼스에는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계에서 활약한 역대 성균관대 총장들도 여럿 있다. 한국 형법학 권위자였던 황산덕 전 총장은 취임 후 한 달 만에 물러나 법무부 장관과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뒤를 이은 현승종 전 총장은 노태우 정부 말 중립내각의 국무총리로 취임해 혼란했던 정국을 안정시켰다. 직선제로 선출된 첫 총장인 장을병 전 총장은 15대 국회의원과 민주당 공동대표·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최근엔 이공계 출신 총장 배출이 활발하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총장직을 수행한 신동렬 전 총장은 성균관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공과대학 제어계측공학과 교수를 거쳐 정보통신대학 컴퓨터공학과 교수를 지냈다.
지난해부터 학교를 이끌고 있는 유지범 총장도 신소재공학부 교수 출신의 나노과학자로, 그간 학교에서 공과대학장과 부총장·산학협력단장 등을 맡았다.
조재연 기자 jaeye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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