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로 만든 일과, 매일 8시간 3천자씩…IT 기업 출신 ‘장르 작가’

임인택 기자 2024. 5. 2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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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하승민 작가,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자
장편소설 ‘멜라닌’으로 제29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하승민 작가. 내년 30돌을 앞둔 권위의 문학상에서 스릴러·추리·에스에프(SF) 등 이른바 장르소설을 써온 작가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히긴 처음이다. 하 작가는 한겨레에 “순문학은 결국 문학적 깊이이지 장르에 관한 용어는 아니다”라며 “동료 작가와 비평에서 인정받는 영역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 말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그가 취미 이상으로 도전하거나 이룬 것들을 나열해본다. 댄스, 격투기, 마술, 록 밴드, 보컬, 작곡, 작사, 소설…. 밴드 앨범 2장을 냈고, 가수 김민종의 최근 노래에 가사를 썼다. 고액 연봉을 받아가며 20~30대에 그가 일한 곳은 네이버 전신인 엔에이치엔(NHN)과 한게임, 그리고 토스. “호기심과 수집욕” “동경심과 인정욕구”를 엔진 삼아 2024년 5월 그는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에 이르렀다. 지난 4년여, 스릴러·추리·에스에프(SF)로 분류될 소설 단행본 4권과 앤솔러지 1권을 출간한 작가 하승민(43)씨 이야기다.

잘나가는 IT 기업 박차고 나와 ‘매일 3천자씩’ 글 써

지난 이력을 두고 하 작가는 “운 좋게 된 걸 붙잡고 온 삶”이라며 “이전까지 좀 설렁설렁 나이브했는데 조직 생활 하면서 훈련이 많이 됐다”고 했다. 작가로서 ‘8시간 착좌’와 ‘3000자 쓰기’를 매일의 과업으로 삼는다. 책상 앞 8시간을 앉았으나 3000자를 쓰지 못했다면 더 야근하고, 3000자를 썼더라도 8시간을 채운다. 엑셀에 함수를 설정해 일과의 진척 상태가 수치로 표시된다. 이번 장편 당선작 ‘멜라닌’도 이처럼 압박하는 루틴의 소산이다. 3개월 조사하고 6개월 쓰고 3개월 고쳐 썼다거나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인종차별과 자본주의’ 등 15권가량 문헌을 참조하고, 소설의 한 축인 국내 이민·정치사를 엑셀 표에 세세히 조사 정리했다는 말은 각주일 뿐이다. “이민사의 굉장한 디테일”에서 “서사가 아닌 서술”로까지 양단의 심사평이 가능한 배경이었겠다. “‘멜라닌’의 윤곽이 잡힌 건 지난해 가을입니다. 이후 다른 소설 진행하며 묵혀뒀다 독자의 눈으로 다시 보며 퇴고했어요.” 하 작가를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처음 장편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스타트업 토스를 다니면서 뱅크 추진을 맡았는데 퇴근 뒤에도 회사 일로 머리가 안 꺼졌어요. 엑셀과 계약서 화면이 눈에 어른거렸습니다. 완성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감 때문에 이틀에 하루꼴로 잠을 전혀 못 잤어요. 자 보려고 약 먹고 술도 되게 많이 마셨어요. 생활이 완전히 무너졌죠. 어떻게 머리를 끌 것인가 고민하다 장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세계를 만들자. 그리고 도망가자.’ 그게 첫 단행본 ‘콘크리트’였습니다. 평소 찾아보던 플랫폼에 연재했는데 두달 뒤 출판사에서 연락 왔어요.”

―스릴러였군요. 이후 모든 작품도 스릴러이거나 스릴러가 가미되죠?

“네. 데니스 러헤인(데니스 루헤인), 스티븐 킹, 김언수 작가를 좋아했어요. 작품 속 그런 세계를 좋아한다기보다 이 세계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매력의 세계인 거죠. 제가 만들고 컨트롤 가능한 세계. 지금도 공포가 인간을 가장 잘 흔들어놓는, 원초적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또 욕망이 세계와 충돌하며 일으키는 불꽃에 매료되는 편입니다.”

그는 소설 창작을 배운 적이 없다. 30대 중반 퇴근 뒤 에이(A)4 1~1.5장짜리 엽편소설을 종종 써 페이스북에 올렸다. 습작이었던 셈이다. 당시 이야기의 뼈대가 이후 장편소설로 발전하기도 했다. 로버트 매키(로버트 맥키)나 스티븐 킹의 작법서를 읽었다. 2001년 “점수 맞춰” 입학한 신방과 학생으로, ‘소설 창작론’ 교양 수업을 듣긴 했다. 소설 한편 쓰기가 과제였다. 교수로부터 호되게 지적받았다. 학점은 기억도 나질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첫 문학상 수상작이 된다.

“2007년 취업을 준비해야 할 때였는데 석달 뒤면 생활비가 떨어지게 생겼더라고요. 그러다 교내 문학상 포스터를 보고 수업 때 쓴 소설로 응모했어요. 월세가 30만원이었는데 100만원 받았습니다. 교수는 ‘왜 노래가 소설에 등장하냐’고 했는데 흘려들었어요. ‘나는 좋은데….’”

하지만 이후 도전한 에스에프 소설 공모전에선 예심 낙선했다. 세번째 응모가 한겨레문학상이다.

인종차별과 이민사 치밀한 조사…“성취감 컸다”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나눠 보곤 합니다.

“그런 구분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순문학을 드라마 장르라고 부릅니다. 순문학에 대한 관념은 결국 문학적 깊이이지 장르에 관한 용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순문학 하시는 분들이 장르성 쓰면 항상 ‘장르 문법을 차용했다’고 소개되던데, 전 그냥 ‘작가님, 장르 쓰신 겁니다’ 말씀드리고 싶더라고요.(웃음) 온라인 서점에서 등단 작가는 장르 카테고리에 안 넣더군요.”

‘멜라닌’은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부가 파란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다. 작중 파란 피부는 백인 아이에게도 발생한다. 우연적 변이일 뿐인데 가장 차별받는 ‘인종’과 ‘계급’이 된다. 이주하는 개별의 삶과 2015년 이후 한국과 극우 정권이 들어선 미국의 현실이 촘촘히 맞물린다.

공모전 세번째 도전 ‘한겨레 문학상’…7월 중순 단행본 출간

―두번째 소설은 영상화 판권까지 팔렸다고 하셨는데, 특히 한겨레문학상에 응모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동경이 있었고요. (장르는) 독자들과 소통하며 확장하는 영역인데, 동료 작가와 비평에서 인정받는 영역이 또 있잖아요. 권위 있는 한겨레문학상에서 어떻게 소설을 봐 주실까, 제가 어디까지 왔나 위치를 알고 싶기도 했습니다.”

“장르소설은 단순한 사건을 다루는 게 아니라 시대나 사회성을 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그간 피력해 온 작가의 문학관이 극대화한 작품이 ‘멜라닌’인 셈이다. “거친 세계의 질감이 좋은데 왜 이렇게 문장이 거칠지 싶은 작품들이 장르 쪽에 많아요. 한참 뒤 보니 제 작품이 그렇더라고요. ‘멜라닌’ 마지막 ‘끝’ 한 글자를 집어넣으면서는 ‘뭔가 완성했구나’ ‘내가 좀 달라졌구나’ 하는 성취감이 컸습니다.”

1981년 부산 출생의 작가는 지난 삶의 변곡점 셋을 이렇게 꼽았다. 성균관대 재학 시절 밴드 결성, 27살 갓 대졸 무경력자가 엔에이치엔 ‘경력 공채’에 대뜸 지원한 끝의 입사, 더 다니면 ‘나란 인간의 성장은 없겠구나’ ‘동경해 오던 세계가 더는 내 인생에서 없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아주 오래 스스로를, 가족을 설득”하고 감행한 퇴사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제 네번째 국면을 열었다. 하 작가는 좋아하는 여러 국내외 작가군에 더글러스 애덤스와 스티븐 모펏을 추가했다. “우주 가장 먼 곳으로 저를 던져주는 두 사람”이라는 수식과 함께다. 지금 여기 문단에서 자신의 “독자”와 종내 닿고 싶은 곳이리라.

수상작의 단행본 출간과 시상식(한겨레신문사 청암홀)은 7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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