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허하라 [세상읽기]

한겨레 2024. 5. 2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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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5·18민중항쟁 제38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지난 2018년 5월17일 오후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 금남로로 1980년 5월 그날의 함성을 재현한 시민시위대가 행진해 들어오고 있다. 광주/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5월은 그 싱그러움 때문인지 유독 의미가 많이 부여되는 달이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서도 잊을 수 없는 달이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존재해서다. 5월18일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국가폭력이 발생했던 날이다. 무고하게 스러진 광주 시민의 희생을 잊지 말고 유지를 이어받아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자는 다짐을 담아 법정기념일이 제정됐다. 시민의 부단한 노력과 포기 없는 항쟁으로 시대가 변해 군부독재 시절처럼 영장 없는 감금, 고문, 학살과 같은 물리적 폭력이 횡행하지는 않으나 민주주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할 부분은 여전히 많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민주주의의 전제이며 존립요건이다. 국민의 정치 의사 형성, 통치의 정당화, 소수자의 기회균등과 보호, 정치 과정의 자유와 개방 등과 같은 민주주의의 내용은 표현의 자유 없이 실현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적 헌법의 근본가치가 된다(강재원, 국제인권법의 이론과 실무 2023, 표현의 자유). 민주정치에 있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인물 또는 공적 사안에 대한 표현의 자유 보장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인 시민은 통치 권한을 누구에게 위임할지 선택하고, 통치 과정을 감시, 견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선택과 감시·견제를 하려면 필요한 정보를 얻고 동료 시민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 보장이 민주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점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인정된다.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정치영역과 공공기관에 속한 공인에 대한 공적 토론 환경에서는 자유로운 표현에 특히 높은 가치가 부여된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특히 국가원수 및 정부 수반과 같은 최고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자는 정당한 비판과 정치적 반대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국가의 우월적 지위를 고려할 때 국가기관은 형사소송을 통해 명예훼손에 대응하지 않도록 자제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우리 사법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명예 주체성을 부정하고, 공적 인물의 공적 사안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에서는 심사 기준을 완화해 명예훼손죄의 성립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법원은 산케이신문 소속 기자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소위 ‘세월호 7시간 동안의 행적’에 대한 소문을 기사로 작성한 사안에서 그 기사의 내용이 허위임을 인정했음에도 ‘비방의 목적’을 부정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국제 인권의 관점에서 국가모독죄 등의 존재 여부가 그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국가모독죄를 갖고 있었고, 유신헌법과 정부 비판을 범죄화하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적이 있으나 민주화 이후 관련 규정들은 삭제됐다.

우리 사회는 언론과 시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제대로 보장하고 있을까. 대통령을 포함한 공직자들은 정권 변동과 무관하게 언론과 시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이나 모욕 등 형사적 대응을 빈번하게 해오고 있다. 주로 허위사실 적시를 근거로 가짜뉴스를 규제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는 수단이라고 주장하는데, 공적 사안에 대한 가짜뉴스의 규제는 결과적으로 허위일지라도 당시에는 정당한 의혹 제기에 해당했던 표현에 대해서는 두터운 보장이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정당화된다는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언론이나 시민은 검경과 같은 강제수사권을 갖고 있거나 초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의혹을 제기할 당시에는 그 사안이 실체적으로 진실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는데, 충분한 취재를 거친 합리적 의혹 제기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허위라고 밝혀지면 모두 ‘가짜뉴스’로 보아 처벌을 시도하면 누구도 적시에 필요한 의혹 제기를 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가 된다. 예전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명예훼손 재판에서 피고인의 지인들이 제출한 탄원서가 떠오른다. 순박하고 착한 피고인이 어쩌다 대통령님을 욕하게 되었는데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치 왕정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탄원서에 입이 썼다. 5월을 맞아 이런 탄원서가 다시 제출되는 일은 없길 바라며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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