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렁덜렁 전세 계약” 말실수 아니다 [편집국장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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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마늘 다 썩겠네." 봄에 비가 많이 내리면 혼자 중얼거리던 말입니다.
마늘에 특별한 이해관계나 감정이 없던 저에게도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마늘 산지를 떠나 도시민이 된 지 꽤 오래되었을 때까지도 비 오는 봄날이면 뜬금없이 마늘밭 걱정을 입에 담았습니다.
예전에 저도 봄에 비가 많이 오면 '감각적으로' 마늘밭을 걱정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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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마늘 다 썩겠네.” 봄에 비가 많이 내리면 혼자 중얼거리던 말입니다. 마늘은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의 대표 작물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마늘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장마철이 되기 전 폭우가 쏟아지면 꼭 저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의 근심이 전이돼 당신들의 근심이 되었던 모양이지요. 마늘에 특별한 이해관계나 감정이 없던 저에게도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마늘 산지를 떠나 도시민이 된 지 꽤 오래되었을 때까지도 비 오는 봄날이면 뜬금없이 마늘밭 걱정을 입에 담았습니다.
이 입버릇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김다은 기자가 쓴 유럽 농촌 기획 기사를 읽으면서였습니다. 지난 호와 이번 호에 이어진 김 기자의 기사에는 ‘연결’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유럽 농촌 순방(?)을 다녀온 소감을 물었을 때 김 기자는 “거기 사람들에게는 도시(민)와 농촌(농부)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아직 많이 남아 있더라고요”라고 말했습니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예전에 저도 봄에 비가 많이 오면 ‘감각적으로’ 마늘밭을 걱정했다는 것을요. 그런데 그 감각이 점점 옅어져서, 시나브로 마늘밭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도요. 전국적으로 5월의 폭우가 쏟아지고 강원 산간 지방에 대설특보까지 발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저는 이제 ‘아이고, 또 과일·채소 값 비싸지겠네’라는 도시 소비자의 감각만 느끼고 표현하고 있더군요.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학습으로 배우고 머리로 외워서 얻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현재 어디에 위치해 있고, 다른 곳(혹은 다른 집단)과 얼마나 멀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지에 따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튀어나오는 입버릇 같은 게 아닐까요? 어떠한 장면을 보거나 상황을 듣고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가슴에는 파장이 없다면 사실은 그 대상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없는 거겠죠.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위장하고 연출하려 해도 어디선가 티가 나게 마련입니다.
“전세를 얻는 젊은 분들이 경험이 없다 보니 덜렁덜렁 계약을 했던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라는, 전세사기 피해에 대한 국토교통부 장관의 말을 듣고도 그저 말실수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덜렁덜렁’이라는 의태어에서 발화자가 지닌 경험과 감각이 짐작되었습니다. ‘덜렁덜렁’은 전 재산을 임차 보증금으로 걸고 세입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세 계약일과 잔금 납부일에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을 단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아니, 주변에 그런 사람을 본 적이라도 있다면 결코 사용하기 힘든 표현입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연결된 감각을 지닐 순 없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단절되어 있는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새 마늘밭에 무감각해진 제가 깨달았듯, ‘단절 감각’이라도 자각해야 그나마 공감의 출발선상에 정직하게 설 수 있을 테니까요.
변진경 편집국장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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