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지치는 판결문…'변화'에 떠밀린 판사들[박가영의 법정블루스]

박가영 기자 2024. 5. 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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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법정에는 애환이 있습니다. 삶의 고비, 혹은 시작에 선 이들의 '찐한'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판사들 일이 너무 많아요. 판결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들여 쓸 여유가 없죠. 비슷한 사건 판결문 보면서 베껴 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려운 용어나 복잡한 문장을 그대로 따라쓰게 되니까 읽기 쉬운 판결문이 나올 수가 없어요."

최근 만난 부장판사 출신 A 변호사는 '판결문을 읽다보면 지친다'는 넋두리에 이렇게 답했다. 소송은 늘어나는데 인력은 부족하다 보니 판사들이 읽는 사람을 고려해 쓰기보다 손에 익은 방식대로 판결문을 작성하게 된다는 얘기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법원에서 판결문은 판사와 소통할 거의 유일한 창구다. 문제는 이 창구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난해한 용어와 문장이 가득한 수백 쪽짜리 판결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며', '~한 점' 등 표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며 한 문장이 한 장을 넘는 경우도 있다.

판결문을 쉽게 쓰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당시 부장판사 강우찬)는 올해 초 미성년자 A씨가 제기한 학교봉사 등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하면서 청소년인 원고를 위해 "원고 학생은 이 점이 무척 억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거가 충분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등 쉬운 표현과 존댓말을 사용해 판단 이유를 따로 적었다.

아쉽게도 이런 노력이 법원 전체로 퍼져나가지 않고 있는 게 법원의 현실이다. '쉬운 판결문'은 여전한 숙제다.

'조희대 코트'가 쉬운 판결문 작성에 의지를 보이는 점은 그래서 다행스럽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조희대 대법원장은 사법부 최우선 현안으로 재판 지연 해소를 꼽고 해법 중 하나로 어렵고 긴 판결문은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을 작성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판결문을 길고 자세하게 쓰는 관행이 이어지다 보니 사건 처리가 늦어지고 업무에 지친 판사들이 기존 판결문을 참고하면서 어려운 법률용어가 고쳐지지 않는다는 데 착안한 조치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우선 민사·가사 소액 사건 등 비교적 쟁점이 간단한 사건부터 △완결된 문장 대신 개조식·나열식으로 △기초 사실 기재를 생략하고 쟁점과 판단만 기재하고 △쟁점 판단 과정에서도 주요 증거만 기재하면서 △주장 항목이 많은 경우 적극적으로 표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판결문을 작성하도록 할 방침이다. 법원행정처는 이런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지난달 25일부터 판결서 적정화 실시 재판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법원이 쉬운 판결문으로 문턱을 낮춘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어려운 법률 용어로 가득한 판결문이 그 자체로 사법부 권위를 상징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는 법원, 변화에 소극적인 법원을 상징하는 게 어려운 판결문이 됐다.

아쉬운 점은 이런 변화가 떠밀리듯 진행되는 측면이 적잖다는 것이다. 법원의 자성보다는 손이 부족해 더이상 예전 같은 판결문을 쓰기 힘든 상황이 쉽고 간결한 판결문을 재촉하고 있다는 얘기다.

서울고법 판사를 지낸 B 변호사는 "MZ세대 판사뿐 아니라 부장판사들도 점점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을 찾아 업무시간을 줄이는 추세"라며 "예전에는 부장판사 90%가 야근·주말 근무를 했지만 지금은 50%도 안 되기 때문에 판결문 작성에 드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훨씬 많아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권위는 결코 어려운 판결문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성 없이는 발전도 없다. 중요한 건 법관들이 얼마나 권위 의식을 덜어내고 변화를 수용하느냐다. C 부장판사는 "간결하고 쉽게 쓴 판결문이 정착되면 작성에 투입하는 시간이 크게 줄고 국민 이해도 높아질 것"이라며 "일부 재판부가 아닌 법원 전체가 함께 노력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가영 기자 park080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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