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우리의 가까운 미래를 위하여

윤정현 부산가톨릭대 대학원 신학과 학과장 2024. 5. 2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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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부산가톨릭대 대학원 신학과 학과장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다. 부활절 아침, 노인요양병원에서 미사를 봉헌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마을 외곽에 위치한 그 요양 병원은 넓은 대지 위에 리조트처럼 서 있었다. 거기서 한 이탈리아 할머니를 만났다. 늙고 병들어서 기억마저 흐릿해지는 그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절은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에 대해 선포하고 증언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날이지만, 그 할머니의 인간적인 고백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주기적으로 노인요양 병원을 방문하여 병자들을 돌본다. 우리나라의 노인요양 병원은 이탈리아에서 방문했던 리조트 같은 분위기 없이 도심지 안의 빌딩에 들어서 있다. 그리고 병원 안의 병실은 그리 크지 않은 한 공간에 수많은 노인을 침대에 눕혀 놓았기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삶을 마감하는 장소치고는 너무나 열악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2019년에 9월 27일에 개정된 의료법 시행규칙 (제34조 관련) 의료기관의 시설규격 라항은 ‘입원실에 설치하는 병상 수는 최대 4병상 (요양병원의 경우에는 6병상)으로 한다. 이 경우 각 병상 간 이격 거리는 최소 1.5m 이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필자가 방문한 많은 노인요양 병원은 규정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인이, 훨씬 더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개인적인 의견이고 조심스럽지만, 방문한 요양 병원의 많은 곳은 ‘죽음의 대기소’처럼 느껴진다. 일생을 열심히 살았지만 이제 병들고 죽음에 임박한 노인들은 어떠한 것도 생산할 가치가 없기에 사회가 무관심과 폭력으로 대하는 ‘죽음의 문화’가 아닐까.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아는 중년 이후의 사람들은 가까운 미래에 늙고 병들지라도 절대 노인요양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마도 오늘날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해 운동하는 수많은 사람은 건강하게 죽고 싶지,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앓으면서 죽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래서 운동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울러 부모가 계신 노인요양 병원의 열악한 상황에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그 자녀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이러한 열악함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자녀들에게 알리려 하지 않는 것처럼….

사실, 노인요양 병원은 인간의 윤리, 사회적 시스템, 자본과 이익이라는 거대한 주제들이 얽혀 있다. 이 모든 주제에 앞서 한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다면, 한 인간이 보다 인간적인 환경에서 생을 고요하고도 평온하게 마감할 권리도 있다. 하지만 어느 노인요양 병원에서든지 ‘현대판 고려장’은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정치와 사회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노인의 복지는 병들고 죽어가는 노인에게는 무관심하며, 수지와 타산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매물로 나올 노인요양 병원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처럼 힘 없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시민사회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더 편한 방법으로 죽자는 ‘안락사’가 ‘존엄사’처럼 변질되어 대두된다.

우리의 생명은, 또 생명의 마감은 쓸모없는 폐기물처럼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죽음에 다가가는 이들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문제이다. 노인 환자가 의식이 뚜렷하든지 그러하지 않든지,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보다 인간적인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 생명이라서 오랜 세월을 연명하는 이들에게도 보다 인간적인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우리 부산은 노인요양 병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문제를 어느 개인이나 (종교)단체가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사회적 담론이기에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이 문제는 개개인의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가까운 미래를 위하여 이 문제는 공론화되고 또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나의 가까운 미래에 지금의 노인요양병원에선 죽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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